우리가 사용하는 언어(言語)는 “생각이나 느낌을 나타내거나 전달하기 위하여 인간의 일반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체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음성 등의 청각적인 수단, 혹은 손을 비롯한 신체 부위를 움직이는 시각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다. 또한 언어는 인간의 소통과 사고의 기반이 되는 동시에 소통과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언어는 자연어와 인공어로 분류할 수 있는데, 자연어는 인류의 각 민족이 오래전부터 생활 속에서 사용해 왔던 언어이고, 인공어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언어가 아닌,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의사소통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말한다. 간략히 분류해보면 첫째, 감정적 언어표현이 있다. 어린아이들이 말을 하지 못할 때 어떤 현상이나 마음에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을 나타내는 언어이다. 배고플 때, 아플 때, 잠이 올 때 등 자신의 요구가 있을 때 이러한 현상을 느낌만으로도 알 수가 있다. 둘째, 언어체계에 따라 학습된 언어 즉 이성적인 언어라고 말 할 수 있다. 생활 속에서 터득한 배운 언어를 표현해 전달하는 것이다. 셋째, 비언어이다. 행동 언어라고도 할 수 있다. 손가락으로 V자를 나타내면 ‘승리’라는 약속된 언어이다. 또 손가락으로 O자를 나타내면 상황에 따라 ‘좋다, 또는‘돈’이라고도 이해한다. 이 외에도 효과적인 의사 교환을 위해 고안된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음성언어, 문자로 표현되는 언어이다.
그러면 음악(音樂)은 무엇인가? “박자, 가락, 음성 따위를 갖가지 형식으로 조화하고 결합하여, 목소리나 악기를 통하여 사상 또는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이라고 한다. 예술이라고 하는 이 음악적 요소에 생활의 언어가 만나 결합하게 되면 감동을 자아내고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음악에 대해 흔히 표현하기를 향기가 있다고 말한다. 사실은 음악은 음악 자체이지 후각으로 인지될 수 없다. 그런데 향기롭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음악을 들을 땐 서로의 말이 필요 없이 느끼는 평안함과 즐거움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운 선율에 마음이 녹아내릴 듯 새로운 세계의 정원을 거니는 마음으로 인지되어 향기라는 시적 표현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용어로 대체된다. 그러므로‘음악은 또 다른 언어다”라고 말한다. 릴케는 음악을 가리켜 “언어들이 끝나는 곳의 언어”라고 했다. 음악은 언어가 가진 특징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의사소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음악은 만국 공통어라 불릴 정도이다. 또한 음악에도 문법이 있다. 화성학, 대위법, 형식론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음악을 넓은 의미의 언어로 포함하곤 했다.
음악은 소리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작곡가의 영감에 의해 채택된 소리가 그 악보의 한정된 시간 안에 다양한 음(音)의 고저장단(高低長短)과 기법에 따라 사람들에게 다양한 느낌을 준다. 그냥 악보(樂譜)일 뿐이지만 사람의 언어가 시적이든지 자연, 인생 등 어떤 주제의 글에 따라 결합하게 되면 악보의 흐름에 슬픔과 희망을 나타내어 주는 묘한 노래로 변하게 된다. 악보 자체는 단순한 것 같아도 언어가 표현하는 느낌을 주면 그냥 달라진다. 반대로 언어는 건조한 것 같으나 악보의 선율에 겹쳐지면 음악적 표현 방법이 특이하게 나타나는 감동이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음악의 언어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예는 슈베르트의 리트(Lied, 가곡)“송어(Die Forelle)”이다. 슈베르트는 아름다운 강물 안에서 뛰어노는 송어의 모습을 그린 시로 음악을 만들었다. 언어를 음악화한 것이다. 음악이 시의 내용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진동 주파수의 세기마다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을 듣기 좋게 조합해서 박자, 가락, 음성 등을 갖가지 형식으로 조화하고 결합하여 청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음악을 통해 사상 또는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예술이기에 언어로서 만나는 음악은 또 다른 언어라 표현하기도 한다. 철강 산업과 기계 공학의 결합으로 항공 우주 사업에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듯이 언어와 음악의 결합으로 예술적 가치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며 글과 악보의 만남을 연결해 보는 눈과 마음을 열어본다.(2023.10.26.)
우리 인생에 음악(音樂)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마치 소금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과 같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음악이란 진동 주파수의 세기마다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을 듣기 좋게 조합하여 소리의 높낮이, 장단, 강약 등의 특성을 소재로 하여 목소리나 악기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예술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소리를 소재로 하여 박자, 선율, 화성, 음색 등을 일정한 법칙과 형식을 종합해서 청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예술이다. 음악 속에 인간의 삶의 질이 존엄으로 나타낼 수 있는 음악 특유의 위대한 힘이 인생의 삶과 뗄 수 없는 영역임을 공감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는 우주와 같은 보이지 않는 공간이 있어 다양한 감정들이 섞여 있다. 보이지 않으며 헤아릴 수 없는 내면의 넓고 깊은 곳에 놀랍게도 음악은 아름다운 예술로서 그 공간 세계에 들어가 인간의 삶을 고취하고, 메마른 영혼을 풍요롭게 만드는 일종의 윤활유 역할을 다양하게 한다. 선율로 듣는 사람에게 평안을 얻기도 하고, 일상의 건조함을 달래는 경쾌한 음악으로 즐거운 마음을 얻기도 한다. 특히 고난 가운데 있는 이에게 많은 위로를 얻기도 하며 삶을 소생시킬 만한 동기를 얻기도 한다. 특별히 누가 찾아와 위로하지 않았고, 상담하지 않았음에도 음악감상 전과 후가 이렇게 다른 반응을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음악의 힘이다. 필자도 한창 어려울 때 특정한 노래에 감동하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당시 오디오 음악 테이프가 늘어져 망가지도록 수십 번 반복해서 위로의 노래를 감상한 적이 있다. 노래가 친구가 되고, 노래가 눈물이 되고, 노래가 위로되었듯 누구라도 노래는 음식을 먹는 것도 아니지만 맛있고 에너지가 된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섬광 같은 깨달음을 주는 인생 노래가 되는 것이다. 그만큼 음악 세계는 마법과 같아서 감수성을 풍부하게 하고 여러 요소의 감정들이 녹아있기에 삶을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시키기도 하며 다시 한번 새로운 용기를 얻어 일어서게 하는 힘과 능력이 있음을 실감한다.
세계 어느 나라이든 여행을 하게 되면 그 현장에서 언어가 다르고 피부가 다르고 생활양식이 달라도 통하는 것이 음악이다. 음악이란 리듬이 있는 만국 공통 언어로서 마음이 통하게 되고 서로 하나가 되어 함께 웃고 기뻐하고 춤을 추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유아들에게도 그들만의 음악 세계에서 왠지 좋아하게 되고 즐거움을 나타내며 율동에 가까운 춤을 추기도 한다. 또한 정서적인 면에서 선율이 좋은 음악을 애써 들려주기도 한다. 그래서 덴마크의 동화 작가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말이 통하지 아니한 곳에서 통하는 그것이 음악이다.”라고 했다. 또한 모차르트는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음악이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어느 곳이든 노랫소리가 시작된다. 우리들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음악이 없다면 얼마나 단조로울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순간순간 필요한 장면마다 아름다운 악기의 연주든 가수의 노래이든 그 주제에 맞는 음률이 흘러나올 때 말할 수 없는 감동의 장면으로 승화시키며 보고 듣는 이에게 특별함을 더해 주는 것이다. 그 주제 음악들이 모든 이의 가슴을 움직일 때 명곡이 되고 명장면이 되고 명작품이 되는 것이다.
서양 속담 중에“흐르는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라는 말이 있다. 흘러가는 시냇물의 아름다운 소리는 곳곳에 박혀 물의 흐름을 방해하던 돌들 때문이지만 흐르는 냇물의 소리는 누가 작곡을 하지 않아도 그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힐링시키는 자연치유의 연주가 된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소리 역시 지붕과 창문을 두드리며 불규칙한 타악기로 나타날 때도 무언가 모르게 마음을 차분하게 하며 심리적 안정을 가져오기도 한다. 고요한 저녁 시간에 몽돌 바닷가에 앉아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며 눈앞에서 하얀 거품을 토해내며 반복하는 소리는 또 하나의 악기가 되어 마음을 시원케 한다. 오늘도 지친 마음과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음악의 나라로 여행한다. 누적된 심리적 피로와 아픔, 건조함을 해소하는 영혼의 비타민 공간으로 간다.(2023.10.15/2023.11.6.거제신문)
목사는 성직자로서 가난해야만 되는가? 이 물음에 명확하게 대답하기 어려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이 물음 앞에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목사라는 성직자 이전에 기독교라는 종교는 물질적 진공상태에서 영적, 정신적인 것만으로 형성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아가페(agape)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룩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뜻하지만, 인간들끼리의 사랑은 물질적인 관계를 떠나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 독립은 인간 독립의 기본이다. 경제적 독립이 되지 않으면 사회적인 독립도 정신적인 독립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이처럼 인간 생활에 있어 물질은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유독 성직자들에 대해서 경제문제에 대한 우리의 관습형성은 너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즉 일반 성도들이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으면 축복으로 여긴다. 그러나 성직자(목사)가 물질을 소유하면 세속적이고 경건치 못하며 영적 지도자로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성직자의 물질관에 대해서 청빈한 삶과 도덕적이고 영성 깊은 삶을 요구하는 본질적 사고는 별 차이는 없는 것 같다. 이런 부분에서 세상 현실과 종교적 현실의 이중적인 사고의 틀에서 서로 어그러져 동떨어짐 현상이 존재한다. 한 걸음 나아가 속을 한번 들여다보면, 성직자 이전에 한 가정의 이루고 있는 가장으로 자녀의 교육 문제, 건강을 위한 의료문제 등, 최소한의 경제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사역자들의 고민도 일일이 드러내기 어려운 것이다. 믿음에 있어 물질이 전부는 아니지만, 현실을 떠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개척하는 일, 선교사 파송하는 일, 재난에 이웃을 돕는 일 등 어느 한 가지도 물질이 아니면 사역 시스템이 진행될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모습이 은혜의 상징으로 되어버린 이 벽을 어떻게 허물 것인가?
더욱 마음에 걸리는 것은 성경의 말씀이다. 먼저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는데 이 대목에서 할 말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잘 살고 싶기도 하고, 가난해지고 싶기도 하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생각인가? 스스로 잘 살고 싶어 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가난을 외치는 모양새가 되는 것 같아 양심의 문제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늘 따라다니는 것이다.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의 모범인 주기도문에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내용이 있다. 어느 전도사님의 농촌목회 시절, 끼니가 없어 배가 불러온 아내와 함께 저녁을 금식하기로 하고 누웠는데 그 형편을 어찌 알았는지 누군가가 쌀 한 되를 슬며시 문 앞에 두고 갔다. 너무나 반가움에 얼른 저녁상을 차려 밥상에 마주 앉아 감사기도를 드리다가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오니’라고 하는 대목에서 목이 멨다고 한다. 굳이 가난이라고 표현하지 않아도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어려운 시절의 목회 현장을 보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아굴의 기도가 마음에 와닿는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8-9)라고 간구한다.
성직자는 물질로부터 초연한 삶을 살아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물질에 지나친 관심을 두게 되면 성직자의 본질적 소명을 잃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자들은 부(富)에 대한 성경의 경고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적 가난을 강조하지 않았다. 칼뱅은 가난이 부유만큼이나 영성에 해롭다고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단순히 돈에서 벗어난 객관적인 신학적 사고를 정립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에 대한 사고가 명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물질이라는 것으로 목회자의 신앙을 테스트하는 도구로 삼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역을 활성화하고 양질화하는 도구로 삼을 뿐 아니라 적극적 차원으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일상의 삶과 깊은 영성에 대한 아굴의 기도를 균형 있게 해석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2023.10.02.)
일반적으로 경제를 말할 때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한 물적 기초가 되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 분배, 소비하는 활동과 그것을 통하여 형성되는 사회관계의 총체를 가리키는 경제용어이다. 이러한 바탕으로 기업이 세워지고 기업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자본을 조달하고 생산요소를 결합해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가지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한다. 그러므로 기업의 일차 목표는 이윤추구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누구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 기업활동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활동을 하기 위해서 재화, 즉 자본이 필요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기업은 이런 자본을 주식발행, 자기자본조달, 타인자본조달 등을 통해 조달할 수 있을 것이고 이렇게 조달된 자본을 통해 기업은 다방면으로 투자 혹은 운용하므로 이윤을 창출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경제적 성장이라고 하고 또 마땅히 성장의 가치를 추구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경제 관념이라 말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달란트(talent) 비유를 대비하여 볼 때 땅에 돈을 묻어둔 종은 주인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그런 행동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경제 실정을 초래했으며 투자에 대한 이윤 창출이야말로 기업이 존립하는 목표이듯 이윤을 내지 못하고 땅에 파묻어 둔 비생산적인 일은 마땅히 지탄받게 되었다.
반대로 다른 방면의 시각에서 경제 논리를 볼 때 주인의 행위는 비판받을 요소로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달란트를 그대로 내어놓은 사람은 이윤을 내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주인의 재산에 손해는 끼치지 않았으며 보존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 자본주의 논리에 의하면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은 것은 주어진 재화의 가치나 그 재화가 가져올 잉여 가치를 조성하지 않았기에 주인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받은바 재화를 보관 유지하는 데 있어 그나마 차선의 길을 택하였기에 그나마 용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학적 논리를 떠나 새로운 시각으로 이 비유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비유에서 주인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의 이윤을 창출하였는가에 있지 않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주인의 의도는 인생에 대한 태도를 평가하는 데 있다. 이 비유의 교훈은 달란트를 많이 받으나 적게 받으나 그것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적었다는 것에 대해서 기분이 상해서 일하지 않았든지, 아니면 한 달란트 가지고는 특별히 할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을 했든지 결국 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한 달란트를 받아 땅속에 묻어두고 나중에 그대로 돌려준 자는 '노동을 하지 않은 자'이다. 그는 인생을 방관한 자이며 삶을 적극적으로 가꾸어 인생을 진보시키지 않은 자이다. 그러므로 그의 태도는 주인의 의도에서 보면 '악하고 불충실하다'라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좀 더 적극적 의미에서 이 비유를 보면, 개개인에게 주어진 달란트는 주인을 위하여 증식되거나 보존되어야 하는 어떤 유형(有形)의 것이라기보다는 그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어진 현실은 서로 다르고 그 출발점도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주인은 그들에게 같은 결과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 자신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하였는가를 평가하고 있다.
결국 달란트 비유의 핵심은 돈이든 재능이든, 얼마나 갖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타고난 것을 최선을 다해 생산적으로 개발하지 않거나 활용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무게중심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받은 청지기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청지기는 자기 자신을 생의 주체로 보지 않고 자신을 한낱 주인의 곡간을 채우는 '도구'나 '수단'으로 비하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를 긍정하지 않은 자가 어떻게 자기 삶에 적극적일 수 있으며 자기의 인생에 대하여 책임지는 태도를 보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면에서 이 비유가 의도하는 윤리적 교훈은 '행함과 실천'의 윤리이며, 자기 인생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가꾸어 나가야 함을 교훈해 주는 것이다.(2023.09.30.)
반려동물(伴侶動物)과 함께한다는 것은 즐거움도 있지만 돌봐야 하는 수고로움이 많이 필요하다. 어쩌다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지만, 사실은 작정하고 집에 들인 것도 아니기에 마음에 준비된 것도 없고 상식도 부족했다. 모두 어릴 적 길가에 버려진 것을 거두어 우유를 먹여가며 키우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우리 집 반려동물들! 약 11년째 함께하는 하얀 옷을 입은 반려견 ‘김기쁨’, 어미 기쁨이의 자식으로 약 7년생 반려견 “구키위”는 초콜릿 색과 하얀색의 두 가지 색이다. 그리고 비 오는 날 부산 **초등학교 구석진 곳에 고양이는 어미의 품을 벗어난 젖먹이로 만나게 되어 지금 약 6년생으로 반려묘 “조키티!”이제는 세 마리가 공존한다.
개 두 마리가 먼저 함께 지내다가 몇 년 후 그들에게 새로운 개체인 고양이가 추가되었을 때 동물들의 본능으로 개들은 못마땅한 듯 으르렁! 거리며 경계하였다. 고양이 영역인 베란다와 개들의 영역인 마당 사이에 가로막힌 유리창을 통해 약 2년이란 기간 동안 눈으로만 보아오다 어느 날 고양이는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개의 영역인 마당으로 뛰쳐나가는 큰 소동이 있어 한순간 전쟁의 기운이 있었지만, 그때의 위험 부담을 넘긴 지금, 개들은 오랜 격리 시간을 통해 어느덧 서로 한 식구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는지 지금은 서로 적대감이 없이 지내는 모습이 신기하고 재미있다.
개, 고양이로 대표되는 ‘반려동물’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우리나라에서 큰 위상 변화를 겪었다. 처음에는 ‘가축’으로 인식하여 사육의 개념으로 사람들과 함께하였다. 개에게 부여된 역할은 주로 다른 가축이나 집 등 재산을 지키는 것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삶의 형태도 변하고 동물에 대한 인식 전환과 세계적 추세 또는 사회적 합의에 나타난 다종의 동물에 대한 이해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타나고 있다.
애완동물(愛玩動物, pet) 또는 반려동물(伴侶動物, companion animal)은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기르는 동물을 말한다. 엄밀하게 따지면 가축의 한 부류라고 할 수 있지만, 가축은 유무형의 자원을 얻기 위해 키우는 동물을 뜻하기 때문에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분리하여 부르는 게 보통이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반려동물은 ‘사람이 정서적으로 의지하고자 가까이 두고 기르는 동물’로, 애완동물은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기르는 동물’로 나타난다. 비슷한 의미로 나타날 수 있지만, 한자를 풀어보면 이해가 쉽다. 애완이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사랑 애(愛) 자에 희롱할 완(玩)자이다. ‘인간이 사랑하고 가지고 노는 동물’로 직역할 수 있다. 그러나 반려라는 말은 짝 반(伴)자에 짝 여(侶)자로 함께 살아가는 벗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동물보호법에도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단순히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키우기보다는 복잡한 사회에서 인간에 지친 이들이 동물에게 위로를 받거나 외롭지 않기 위해 반려를 목적으로 키우는 경우가 많고, 위기에 처한 동물들을 돌보다 정이 들어 반려동물로 함께하는 이들도 상당하다. 어느새 우리나라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며 함께 사는 인구는 어느새 1,000만 명이 넘어가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4가구 중 1가구가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냥 집사(執事)! 고양이를 시중들듯이 살뜰히 돌보며 기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다. 오늘도 집사로서 소임을 감당하고 있다. 그러나 간단치는 않다. 대소변 정리하는 일, 영양 있는 먹거리와 간식, 물을 제공하는 일, 함께 놀아주는 일, 무엇보다도 청소하는 일이다. 애정과 책임이 없다면 힘든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냥-집사(執事)라고 부르는 것 같다. 우리 집 반려묘 조키티, 우리 집 반려견 김기쁨과 구키위, 그리고 딸네 집 두 마리 냥이 꿍이와 아리, 모두가 우리 곁에 있다. 기쁨이와 키위의 놀이공간 뒷마당에서 즐겁게 뛰며 논다. 가끔 바깥 차도로 달려 나가기에 위험할세라 보초 서는 임무는 내 몫이다. 반려동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하다.(2023.09.28.)
한 개인의 가난이든, 교회의 가난이든 이것은 실로 현실이며 때로는 얼마나 아픈 일인지 모른다. 대도시의 특정교회와 중소도시의 적당한 규모를 가진 교회를 제외한다면 실로 많은 교회가 이런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 나라는 건설되어야 하고, 확장되어야 하며, 많은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의 몸부림과 안타까움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면에서 학적인 기술보다는 성서에 나타난 예루살렘교회의 가난에 대한 바울의 방법에 접근해 볼 수 있다.
예루살렘교회는 모체교회이다. 즉 어머니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교회의 배경을 보면 아마도 수년간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던 것 같다. 다른 유대인들도 생활하기가 어려웠지만, 유대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형편은 더 심각했다. 왜냐하면 다른 유대인들이 교회를 핍박했기 때문이다. 유대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지방에 사는 기독교인들뿐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세운 여러 교회에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을 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중에서 형편이 몹시 어려운 마게도냐 교회는 헌금을 생각보다 훨씬 많이 하였지만, 지식이나 은사 면에서 훨씬 뛰어난 고린도 교회는 말만 무성했지 정작 헌금은 모으다가 중지한 상태였다. 바울은 은근히 마게도냐 교회를 예로 들면서 ‘고린도 교회 너희가 마게도냐 교회보다 못해서야 되겠느냐’라고 하면서 어려운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헌금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뜻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무한정으로 책임지지 못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인간으로서 최악의 상황에 부닥쳤을 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능력의 범위 안에서 힘껏 도와야 한다는 교훈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한계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지 그의 모든 생활을 완전히 책임져 주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너무 영적인 면에 치우친 나머지 그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뜻만 알고 기다리는 경향이 짙게 나타난다. 이것은 영적인 필요를 강조한 나머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마저 외면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세상 나라 사람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할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의무가 있고, 하나님 백성으로서도 도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마게도냐 교회는 많은 시련과 핍박을 받았는데, 특히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극한 가난 가운데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했다고 증거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떠오르는데, 마게도냐 교회가 어려움 가운데서 정신이 살아있고 성령에 충만한 것은 이해되지만 헌금을 많이 했다는 것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일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리 성령 안에서 기뻐한다고 해도 그것이 헌금으로 나타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받는 것은 은혜받는 것이고, 책임을 지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게도냐 교인들은 그러한 생각을 뛰어넘었다. 반면에 고린도 교회는 마게도냐 교회보다 믿음과 말과 지식이 아주 뛰어난 교회였다. 그런데 헌금하는 일에 이렇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말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이 너무나 달랐고 대조적이었다. 여기에 중요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라고 한다. 이 말씀은 ‘남을 부요케 하기 위한 가난’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가난을 말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런 희생으로 큰 구원을 주셨기에 자신의 영혼이 소중하다면 다른 영혼도 소중하다. 자신의 양식이 중요하다면 다른 자의 양식도 중요하며 자신의 아픔이 괴로움이라면 다른 이의 아픔도 나와 같은 괴로움이라는 뜻이 아닐까?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겠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2023.09.28.)
최근 기후 변화 및 지진 등 자연재해가 많아지면서 지구가 매우 아프다는 것을 모두 실감하고 있다. 온난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되었고 그 아픔이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 속에 직접 피부로 느끼는 큰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들의 기술적인 발달과 끝없는 욕구를 채우며 발전한 산업사회의 요구는 결국 자연계를 변형시켰으며, 생태구조에 구멍을 뚫게 되어 만물은 신음하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서 생활 자체의 위기 앞에 떨고 있다. 현대사회를 이룬 인간들의 무분별한 정복과 약탈로 인해 피조물의 탄식은 극에 달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현대문명 곧 과학적인 지식을 산업생산에 적용하여 현대 산업화를 이루어 온 국가들은 이러한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된 세계와의 조화와 평화로운 관리보다는 더 큰 이익과 더 많은 자산을 터전으로 편리하고 더 풍성한 삶을 추구하면서 자연의 무분별한 정복, 자연의 극한적인 이용, 자연으로부터의 무한정한 취득의 방법에 의존함으로써 오늘날 모든 인류가 직면한 생태학적인 위기를 가져온 것이다.
이처럼 산업 국가들이 눈앞의 요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것인 자연을 이용대상으로 여기고, 무한히 이용될 수 있는 이익 가능성의 대상으로만 여겨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 이로 말미암아 자연은 지대한 아픔과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생태계의 근원적인 문제를 사람들의 삶 앞에 토해 내게 된 것이다. 구조적인 자연 파괴와 산업사회의 이면에서 모르는 사이에 변질하는 삶의 환경에 대하여 환경운동자들의 특수활동 분야에만 맡겨 놓을 수 있는 단계가 이미 넘은 것이다. 국제기구를 비롯한 세계 시민들이 이 부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생태학적인 질서 회복을 위해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공의가 만물에 미치도록 할 의무를 자각하여야만 한다.
최근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를 지키기 위해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생명의 길 초록 발자국 캠페인을 시작했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기후 위기 대처의 핵심은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온실가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탄소의 배출량을 줄이는 것이 관건이다.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발표하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탄소 배출을 줄여나가기로 하면서 채식 위주로 밥상 꾸리기와 유행을 따르지 않는 소박한 옷장 만들기, 자동차 대신 자전거와 공공 교통 이용 확대, 전자영수증 발급, 텀블러·다회용 컵 이용, 일회용 컵 반환, 리필스테이션 이용, 다회용기 이용, 무공해차 대여, 친환경제품 구매, 고품질 재활용품 배출, 폐휴대폰 반납, 미래세대 실천 행동 등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친환경 활동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자연을 공격하면 결국은 자연이 우리를 공격하게 될 것이기에 이 창조 세계를 지키는 것이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환경운동연대는 “유엔의 과학적 경고에 의하면 오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약 45% 삭감해야 한다며, 기후 위기 대응에 시간이 많지 않다”라고 했다. "아이들도 사람들도 온도가 1도 올라가면 열병 생긴다. 그런데 지구촌 전체가 1도 2도 올라간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된다. 2050년까지 1.5도 이상 올라가면 안 된다. 지금 속도로 살면 2도까지도 금세 올라가기 때문에…" 라고 하였다. 하루라도 빨리 화석 연료 중독, 소비주의 중독에서 빠져나와 지속 가능한 경제로 전화해야 하며 전방위적이고 급박하게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 14번째로 탄소중립 비전을 법제화한 국가가 되었다. 2050 탄소중립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계획이 실제 생활국면으로 나아가 국민이 피부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전달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대부분의 생물 종들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도 보장할 수 없다고 한다. 인류 스스로가 자초한 기후 위기에 직면하여 우리 자신은 물론 후손들을 위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생존의 물음이다. 기후 위기의 큰 피해자는 청소년들과 다음 세대이다. 바로 우리 자녀들과 어린 손주들이다. 탄소중립! 모두 실천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2023.09.25.)
남자라고 꽃을 좋아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대체로 여자들이 꽃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특별한 날이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꽃이 빠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사랑하는 연인에게 드려지는 꽃다발에 감동하지 아니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필자는 꽃시장을 많이 찾는다. 아내가 주기적으로 꽃꽂이를 하니 몇십 년 꽃과 가까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양 예쁜 얼굴을 내미는 꽃들을 한 아름 안고서 짙은 꽃내음을 가장 가까이 느끼는 것은 또 하나의 삶의 기쁨이다.
모든 생명체에는 냄새가 있다. 저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냄새가 발산된다. 장미나 백합 같은 꽃내음은 순식간에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예쁜 모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꽃에서 뿜어내는 오묘하고 독특한 꽃내음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이 좋은 냄새를 우리는 향기(香氣)라 부른다. 사람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냄새로서 공기 중에 발산되어 인간의 후각 신경에 감각되는 여러 휘발성 성분 가운데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향기로 인해 일단은 무언가 모르게 미소를 띤 얼굴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이 평온해지기도 한다. 모든 사람이 풍기는 냄새로 인하여 같은 향을 맡으면서 같은 감정을 일으키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좋은 향기를 후각으로 느끼면서 기억과 연결이 되어 좋은 감정으로 추억에 젖기도 한다. 인간이 향기나 냄새를 맡으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기에 향기로움에서 향수의 독특한 세계가 계속해서 펼쳐진다.
모든 사물에는 각기 독특한 냄새가 있다. 그런데 이 냄새들이 좋은 냄새일 때는 향기가 되지만 나쁜 냄새일 때는 악취가 된다. 식당에 가면 음식 냄새가 나고, 병원에 가면 소독약 냄새가 나고, 고깃집에 가면 고기 냄새가 옷에 밴다. 똑같은 병에 참기름을 넣으면 참기름 냄새가 나고, 간장을 담으면 간장 냄새가 나고, 화장품을 담으면 화장품 냄새가 난다. 이렇듯 향기로운 냄새는 피곤하고 우울한 기분을 위로하여 주지만, 썩고 부패한 냄새는 오히려 사람을 불쾌하게 하고 짜증 나게 만든다. 이처럼 인간은 항상 냄새에 둘러싸여 어떨 때는 향기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악취로 나타나게 된다. ‘코로 맡을 수 있는 온갖 기운을 냄새’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냄새는 좋고 나쁨을 떠나 사람 사는 세상에서 대체로 썩은 냄새라든지, 고약한 냄새라고 표현하며 부정적으로 쓰이는 예가 많다. 그래서 ‘냄새는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에서 중요한 하나의 정보원이 된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모습이나 행위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향기 또는 악취에 비유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꽃향기는 꽃이 지면 향기가 나지 않지만 좋은 사람의 향기는 영원히 지지 않은 향기이다. 사람도 꽃과 마찬가지로 백리향, 천리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풍기는 인격의 향기는 바람이 없어도 상대에게 전달된다. 그냥 몸에 뿌린 향수에서 나오는 향기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나타내는 말과 행동에서 풍기는 향기가 멀리 갈 뿐 아니라 그 풍김이 오래 가는 것이다.
향기는 나 자신도 좋고, 남도 좋게 하는 특성이 있다. 향기의 특성은 장소와 상황 따라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는 진하게 나타나고 저기서는 약하지 않는다. 또 이럴 때는 향기로 진동하다가 저럴 때는 향기가 악취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향기는 쓰레기통에서도 향기이다. 남들이 없을 때도 향기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아카시아 향기는 밤중에 더 진동하는 것처럼 최악의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삶을 살게 하는 것, 그것이 밤중 같은 삶을 사는 순간에도 더 진동하는 향기여야 한다. '인품'이란 단시일에 완성되지 않는다. 사물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내면에서 무르익어야 한다. 그때라야 '인품'은 향기처럼 스며 나오는 것이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인품도 단시일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씻고 나면 없어지는 향수가 아니라, 끊임없이 솟아나는 향기로 세상에 감동과 생기를 주는 향기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2023.09.18.)
지혜의 왕이라 불리는 솔로몬은 기원전 10세기의 인물로,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제3대 왕이다. 솔로몬은 즉위 후 일천 번째를 드리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다. 그 지혜가 발휘된 명장면 중 하나가 솔로몬의 재판이다. 이스라엘 왕정 초기에는 왕이 백성의 소송과 분쟁에 관여했다. 왕은 백성의 송사를 재판할 사람을 지명하기도 하고, 직접 판결하기도 하였다. 사건의 개요는 한집에 사는 두 여자가 3일 간격으로 남자아이를 출산했다. 며칠 후 한 아이가 죽자, 두 여자는 솔로몬을 찾아와 산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서로 주장한다. 지금처럼 탐문수사나 DNA 조사를 통해서 밝혀질 수 있겠지만 그때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여인들의 송사를 왕인 솔로몬이 직접 맡은 이유는 누구도 쉽게 판결할 수 없는 사건으로 추정된다. 서로 자기가 생모라고 주장하니 참말과 거짓말을 가려야만 하는 생명의 문제이다. 그때 기상천외한 판결을 내린다.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 앞으로 가져온지라 왕이 이르되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왕상3:24-25)고 주문한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아기의 생명을 두 쪽 내라는 게 어떻게 지혜로운 판결인가? 왕의 판결에 한 여인은 아연실색하며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청원하며 포기하였다. 이때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의 어머니이니라"(왕상3:27)라고 판결에 마침표를 찍었다. 왜 명판결이라고 하는가? 솔로몬은 아픔을 아는 자였다. 아픔을 아는 자는 진실을 알게 된다. 아픔을 보듬으면 사람이 보인다. 아픔을 보듬으면 영혼이 보이며 영혼을 다루는 사람이 된다. 자식을 찾고자 하는 어미의 아픔을 알았기에 올바른 판결을 할 수 있었다. 아픔을 아는 자였기에 명판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C.C.C를 창설한 김준곤 목사는 사랑하는 딸을 암으로 천국에 보내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가정의 비극을 통하여 깊은 아픔을 가슴에 묻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이다. 장애인 사역을 하신 어떤 목사는 자기 아들이 교통사고가 나 두 다리를 절단한 후 그 아들의 아픔을 보면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았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아버지의 아픔을 몰랐다는 것이다. 동생의 죄악만 바라보았지, 떠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아픔을 몰랐다. 그는 집만 안 떠났을 뿐 그 역시 집안의 탕자였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픔이 동반된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하는 일 때문에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아픔을 겪는다. 세상에서 자기 것을 팔아 나눠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부모일 것이다. 오직 자식이 잘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부모만이 자식의 아픔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는 것, 없는 것, 다 팔아 공부시키고 손 내밀면 빚을 내어서라도 나눠주는 것이다.
가령 우리 가정에서 병들어 신음하는 자녀가 있다고 상상해 보자. 게다가 흉악한 귀신 들린 경우는 끔찍하고 몸서리치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자녀 하나가 있다면 그 가정은 365일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성경에 나타나는 가나안 여인의 절박한 문제였다(마15:21-28). 처지를 바꾸어 생각한다면 귀신 들린 딸의 고통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 가나안 여인의 간절한 소원은 자신의 딸이 치유되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여인이 하는 말을 살펴보자. 내 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지 아니하고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이다. 딸의 고통과 아픔이 곧 어머니의 고통과 아픔이었음을 잘 알 수 있다. 결국 그의 소원대로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사 그의 딸이 나음을 입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딸이 고통에서 해방된 것은 곧 그의 어머니도 그 고통에서 해방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일이었기에 그의 믿음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사랑은 때때로 아픔을 가져온다. 우리는 주변의 아픔을 보아야 한다. 아픔을 아는 자로서 살아갈 때 우리가 사는 이 땅이 그래도 살맛이 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2023.09.15.)
여러 장르의 음악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이지만 마음을 정화해 주는 듯한 곡의 흐름이나 가사가 좋으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지금도 여전히 감동하는 ‘바다에 뜨는 별’이라는 노래가 있다. 제목부터도 많은 느낌을 주는 이 노래는 젊은 시절부터 나의 영성 생활의 교과서와 같은 한 권의 책을 펼친 듯 자주 애창하였다. 여러 사람이 이 노래를 불렀지만, 성악가와 대중가수가 듀엣으로 부른 노래로 느낌이 좋아 감동을 얻는 노래이다. 노래 가사에 기독교 색채를 강하게 풍기는 단어가 없고, 멜로디가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어서 그런지 CCM이라기보다 건전가요처럼 느껴진다. 서정적인 가사 내용이 자신을 향한 깨우침으로 가슴에 와닿기에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노랫말이다.
“부서져야 하리 더 많이 부서져야 하리 이생의 욕심이 하얗게 부서져 소금이 될 때까지
무너져야 하리 더 많이 무너져야 하리 이기적 자아가 푸르른 상처로 질펀히 눕기까지.
깨어져야 하리 더 많이 깨어져야 하리 교만한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 흰 파도 될 때까지
씻겨야 하리 더 많이 씻기고 또 씻겨 때가 낀 영혼이 말끔히 씻기어
하늘에 그 얼굴 비추기까지 …”
부서져야 하고, 무너져야 하고, 깨어져야 하고, 씻겨야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려는지 속 내면에서부터 반응하고 있다. 히브리 격언에 '하나님은 부서진 것들을 사용하신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구약의 다섯 가지 제사에 소제(素祭)가 있는데 곡물을 제물로 드려지는 제사로서 헌신과 충성을 나타낸다. 소제는 곡물을 예물로 삼되 ‘고운 가루’로 빻아야만 한다. 조그마한 덩어리가 있어서도 안 된다. 미세한 분말이 될 때까지 갈아져야 한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뜻과 생각을 말씀의 절구통에 넣어 함께 가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단단한 곡식이 부서져야 빵이 되며, 포도가 으깨어져야 포도주가 되며, 향수도 잘게 부서짐을 통하여 만들어진다. 단단하고 질긴 음식도 우리의 입안에서 고르고 잘게 부서져야 소화되어 영양분이 된다. 이처럼 사람도 원숙한 인격과 신앙도 반드시 부서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부서짐의 시작이 성숙의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옛날에 가을이면 시골에서는 도리깨질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거두어들인 곡식을 마당에 펼쳐 놓고 사정없이 도리깨로 후려친다. 이 방법은 껍데기를 벗겨내기 위함이다.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기 위함이다. 우리의 농부이신 하나님도 우리에게 도리깨질하실 때가 있다. 많이 아프다. 많이 힘들다. 도리깨질은 멈추지 않는다. 더 많이 부서지라 하심이다. 더 많이 깨어지라 하심이다. 부서져야 사용하시고 부서진 만큼 쓰실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하심이다. 기독교는 죽음을 통하여 살고, 버림을 통하여 얻고, 부서짐을 통하여 알곡 되고, 깨어짐을 통하여 쓰임 받고, 포기함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고백을 했다.
우리의 육체가 근육운동을 할수록 더 강해지고 단단해지듯이 우리의 인격과 마음이 부서지고, 깨어지는 운동 과정을 통해서 겸손해진다. 겸손이란 우연히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고통을 통해서 깨어지고 낮아져 훈련받은 사람만이 갖출 수 있는 인격이다. 겸손은 자기를 투시할 줄 아는 맑은 자의식을 가진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전에 자신의 성격과 기질들, 즉 혈기와 분노, 미움과 증오, 원망과 짜증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할지라도 다 버리고, 다 고치고, 낮아져서 교만한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 흰 파도 될 때까지 씻긴다면, 때가 낀 영혼이 말끔히 씻기어져서 비로소 멋진 인생, 명품인생으로 거듭날 것이다. 시련이 오면 고통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반성하며 기다리는 인내의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부서졌다고 서운해 말아야 한다. 무너졌다고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서 푸른 하늘이 보이듯 그 상처와 아픔이 흰 파도에 말끔히 씻겨져 바다 위, 곧 하늘로 뜨는 아름답고 빛나는 별이 될 것이다.(2023.09.14.)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는 행복에 대한 갈망이 있다. 많은 사람이 행복을 노래하고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어떤 것이 행복이며, 또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매우 설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서 행복의 가치관도 많이 달라질 뿐 아니라 행복이라는 것이 공기처럼 색깔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우주공간에 흐르는 기운 같아서 행복을 딱히 표현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 행복이란 정체가 어려서는 화려한 희망의 옷을 입고 나타나고, 젊어서는 욕망의 가운을 걸친 또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났다가 중장년에는 남루한 모습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데 바로 이 옷이 나에게 맞는 옷인가 보다 생각되었다.
화려하지 않아도 멀리 있지 않아도 오늘 하루 숨 쉴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오래 걸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평생 함께 살아온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느끼게 된다. 오랫동안 너무 가까이 있어 습관처럼 내게 행복을 안겨주고 있다는 것을 그저 예사롭게 여기며 살다가 이제 알게 될 때 미안하며 고마움을 느낀다. 어느 대중가수가 불렀던 노랫말 중에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물안개 피는 언덕에 서서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리'라는 노래가 인생의 한 부분의 짚어주는 것 같다. 오늘 하루의 행복의 문빗장을 열어 사랑하는 아내 趙順美와 마주하게 되는 기쁨, 혼자가 아니라 함께하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누구나 말하는 ‘행복’이 내 곁으로 왔다는 것을 알고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독백하는 말이 ‘바로 네가 행복이구나’라고 인사를 건넨다.
돌이켜보니 늘 행복하면서도 행복하다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았다. 소유의 넉넉함이 없어도 행복했었고 굳이 행복을 찾지 않아도 이미 행복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행복은 크고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며 좋은 환경이나 외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행복이란 내면의 충만감이라는 것을 세월이 흐른 후에야 알려주는 이야기였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보석이 많다. 그러나 지금의 가장 아름다운 보석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웃음인 것 같다. 그 따뜻한 웃음과 따뜻한 말이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로서 삶이 힘들고 지칠 때면 어느새 마음은 평안을 얻으며 불안해질 때마다 필요한 양약이 된다. 프랑스의 사상가 퐁트넬의 말을 생각해보면 ‘행복을 얻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더 큰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다.’라고 했듯이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이 깨알과 같은 행복의 도구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만남, 늘 함께하는 친근한 교우들, 이른 아침의 따뜻한 커피 한 잔, 운동이나 산책 후에 마시는 생수 한 컵, 귓가에 흐르는 노랫소리 등 모든 것이 의미가 있으며 많은 행복의 재료들이 주단처럼 깔려 있다. 그 길을 지금 걷고 있다.
얼마만큼 행복한가 하는 것은 인생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행복이라는 것은 무언가 좋은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행복의 자기 기준이 분명해야 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된다. 남들이 누리는 행복이 아닌 자신에 대한 행복의 정체성과 입장이 정리돼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뜬구름 잡는듯한 공허한 행복 타령만 하고 소득 없는 인생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실제로 상당수의 사람이 행복을 곧 소유라고 생각한다. 원하는 것을 많이 가지면 행복하다는 게 보편적 생각이다. 그러나 행복이란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절대기준은 없다. 그만큼 상대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행복에 대한 자기 정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작은 행복을 모르면 큰 행복도 모른다. 정말 아름다운 행복은 일상생활에서 작은 것들 안에 있음을 만날 수 있다. 왜 몰랐을까? 행복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니며 거창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행복은 오늘이라는 일상 안에 계속 있었고 나에게 속삭이듯 말을 했지만“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이 우리의 눈과 마음을 가려 발견하지 못하고, 누릴 줄 몰랐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아픈 사람이 건강의 소중함을 알듯이 이전에 미처 몰랐던 소중한 행복을 만나게 된다. 너 행복! 고맙다.(2023.09.12.)
좋은 나무는 좋은 땅을 만날 때 빛을 발한다고 한다. 나무가 아무리 좋아도 좋은 땅을 만나지 못하면 아름다운 결실을 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좋은 나무와 같은 사람, 좋은 땅과 같은 사람이 그리워질 때가 많다.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떠나가기도 한다. 만나는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에 따라서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무미건조한 느낌을 주거나 어떤 사람은 왠지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긍정적 에너지로 함께 기분이 상쾌해지는 사람 있어 그 사람으로 인하여 기쁨을 얻게 될 때도 있다. 때로는 관심을 가질만한 느낌이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자주 마주치다 보면 처음과 달리 그 속에 숨은 매력이 있는 사람도 발견하게 된다.
삶의 연륜이 쌓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속마음을 쏟아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스스로 생각을 해 보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미건조하거나 호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부족한 인격과 됨됨이 그리고 그릇이 되지 못했음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도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항상 좋은 사람을 찾고 있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기분이 좋아지고 옆에 있으면 든든해지며 나를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을 원하고 있다. 이를테면 마음이 착한 사람, 배려할 줄 아는 사람,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 상대방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 언제든 편안한 사람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렇지 못한데 맞춤형 이웃을 선호하며 희망 사항만 열거한다면 참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세월이 스승이 되어 많은 인생의 가르침을 준다. 이제는 베풀어야 하고, 나누어야 하고,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야 하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하는 것이 사명으로 남는 것 같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시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햇빛이 되고 때론 그늘이 되면서 필요할 때마다 이동식 카페가 되어 소담한 이야기, 진솔한 이야기, 흘러나오는 마음을 만져주어야 한다. 돌이켜보면,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빚진 것이 많으니 마땅히 갚아야 하는 심정이다. 이제는 나로 인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이런 솔직한 마음이 전달되기 위해서 애써 흉내라도 내면서 만나는 이마다 1%의 작은 기쁨이 되었으면 한다.
누구나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와 아픔을 가진 사람이 있듯 사랑으로 치유되어 결국엔 세월이 지나도 서로가 가슴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날 아픔을 경험했기에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이 좋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인간관계는 무엇을 하든지 처음보다 끝이 좋아야 하고, 시작보다는 결론이 더 중요하다. 비행기는 이륙도 잘해야 하지만, 착륙을 더 잘해야 성공적 비행이 된다. 만일 착륙이 잘못되면 이제까지 아무리 비행을 성공적으로 해도 모든 수고와 노력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인생도 처음에는 초라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실패가 있다 하더라도 마지막을 아름답게 끝낸 사람이 성공한 사람일 것이다. 시작도 좋고 끝도 좋으면 더 바랄 것이 없지만, 그러나 시작이 부족하고 미미했어도 끝이 좋아야 시작도 빛이 나며, 끝이 좋아야 과정도 교훈이 된다. 무슨 일이든지 끝이 좋아야 한다. 물건도 끝이 좋아야 명품이 되며 끝마무리 1%의 수고가 들어가지만 100%의 효과를 거두게 된다. 좋은 영화는 마지막 장면이 좋다. 좋은 소설은 결말이 아름답다. 좋은 물건은 끝마무리가 깔끔하고, 좋은 회사는 끝까지 책임지며, 좋은 경기는 끝이 좋다. 좋은 사랑은 끝까지 아름답고, 끝이 좋아야 명품, 명인, 명가가 된다. 끝이 좋아야 인생이 아름답듯 소리도 없는데 있어야 할 자리에 소리 없이 있어 주는 사람으로 끝까지 경주하고자 한다.
사람보다 소중한 존재는 없다. 이전에 좋은 사람을 찾았지만, 이제는 내가 먼저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면 그도 내게로 다가와 좋은 사람이 되어 줄 것이며 서로가 행복할 수 있기에 또 하나의 삶의 방법이다. 나로 인하여 작은 마음을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기도드린다.(2023.09.07.)
성경의 제일 첫머리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라(창1:1)”라고 이렇게 기록한다. 태초는 언제이며, 천지는 얼마나 큰지 인간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임을 알게 된다. 실로 우주가 얼마나 광활한지 측량할 수 없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광활하다. 일반적으로 최신 과학 장비를 통해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가장 먼 별은 200억 광년 거리에 있는 별이라고 배운 바가 있다. 200억 광년의 거리란, 1초에 30만Km를 날아갈 수 있는 빛이 200억 년 동안을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서 이를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런데 최근 현재까지 인류가 관측한 것 중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고대 별의 모습이 제임스 웨브 우주망원경(JWST·웹 망원경)에 포착됐다고 한다. 미국 스페이스닷컴 등 외신은 웹 망원경이 지구에서 약 129억 광년 떨어진 별 ‘어렌델’(Earendel)을 관측했다고 보도했다(2023.8.10. 조선일보). 공개된 사진을 보면 어렌델은 밝게 빛나는 수많은 천체가 아닌 오른편 중앙 하단 작은 점 수준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이는 물론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먼 거리 때문인데 그나마 이를 관측하게 했던 것은 중력렌즈 효과 덕분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우주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통상적 개념으로 거리와 시간상의 문제는 의미가 없다. 그만큼 넓고 거대하고 광활한 곳이며 그것도 지구의 작은 모래알보다 더 많은 별이 셀 수 없을 만큼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은하에는 약 2천억 개에서 4천억 개의 별이 존재한다. 여기서 별의 개수를 최소로 잡고, 1초에 별을 하나씩 센다고 가정하면 우리 은하에 있는 별을 모두 세기 위해서는 약 380,517년이 걸린다. 더 빠르게 1초에 10개의 별을 센다고 해도 38,051년이 걸릴 정도로 엄청 많은 별이 존재한다. 우리의 수명을 80세로 잡고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 1초에 별을 하나씩 센다고 가정하면 총 25억 개의 별을 셀 수 있고, 이는 실제 존재하는 별의 고작 0.83%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숫자이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우주 공간이 있을 수 있다. 과학의 발전이 더 이루어지면 더 큰 세계가 펼쳐질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크신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우주적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송 속에서 헤아려 본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 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 제물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도성인신'(道成人身)이란 말은 말씀(道)이 인간의 몸(人身)이 되었다(成)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셨음을 의미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표현이다. 우주 가운데 티끌만도 비교가 되지 못할 작은 인간이란 존재인 나에게 찾아오신 사랑과 그 구속하심의 놀라운 일이 형용할 수 없는 내게 주신 은혜이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다. 폴 틸리히는 "하나님의 임재가 뚫고 들어가지 못할 인간의 상황은 없다"라고 했다. 곧 영원한 사랑과 생명이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우주적 공간에서 나란 존재에게로 이어지는 사랑의 행렬이기에 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 사랑이 너무 광대하여 내게 임한 사랑이 날마다 행복하게 한다. “저 높은 곳에 행성을 지나! 광야 같은 이 세상에 촘촘히 뿌려진 붉게 물든 사랑, 주단 길 따라 걸어가겠네! 걸어가리 그 사랑 따라서 갈림길에도 십자가 바라본다. 하늘 위에 하늘도 바다 깊은 바다도 못 미칠 곳 없는 그 크신 사랑 별빛 반짝거리며 바다 물결 출렁이며 바람 소리에 주님의 숨결 느껴 가슴 깊이 느껴지네! 그 이름 임마누엘. 마음에 새겨진 은혜 하늘 보좌로부터 낮은 곳 이 땅에 이어지는 한없는 그 사랑 소망 없는 그들에게 희망의 발이 없어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셨네. 그들은 땅에 묻었지만, 부활의 씨앗으로 영원한 새 생명으로 내 맘에 오신 그 놀라운 사랑 새 생명을 얻은 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냐.”오늘도 행복을 노래한다. (2023.08.20.)
말은 그 사람의 표현이다. 곧 그 사람의 얼굴이며 품성이다. 그 사람이 쓰는 말을 보고 우리는 그 사람의 인품과 교양 그리고 지식과 성격을 알 수 있다. 말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한 번이라도 생각하여 저장하게 되면 무의식중에 표출되어 나온다. 우리가 하는 말들은 우리의 내면과 삶의 태도, 감정과 사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면 그 사람의 인간적 점수가 나온다. 우리의 대화에 눈물이 나도록 고맙고 따뜻한 말들은 각박한 세상과 함께 사라져가고, 독을 품은 것처럼 폭언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었다.
잠언에서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잠 16:28)”라고 하였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 11:13)”라고 하였다. 말은 죄악의 중매꾼과 같아서 친한 벗을 이간시키기도 하고, 남의 비밀을 누설하기도 한다. 이것은 남의 인격을 파괴하고 죽이려고 중상, 참소, 조소, 아첨 등 독사의 독처럼 발사하는 것이다. 악한 말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와 같아서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인다. 소나 말은 힘센 짐승이지만 그 코를 꿰고 그 입에 재갈을 먹임으로써 제어하듯이 우리의 입술을 고루 제어하므로 인간의 인격과 품위를 지키고 유지해 나가야 한다.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라고 하였고, 잠언은“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라고 하였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과격하게 표현되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혈기와 감정은 우리의 입을 통해서 모나고 가시 돋친 말로서 표현되고 폭언을 거침없이 쏟아놓게 한다. 뻣뻣한 푸성귀에다 소금을 쳐서 부드럽게 하듯이 우리의 말에도 소금을 쳐서 가시와 독을 제거해야 하는 작업을 부단히 계속해야 한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골 4:6)”고 하였듯이 말이란 들을 맛이 있어야 한다. 어떤 이의 말은 삼단논법적이고 청산유수 같으나 유익을 끼치지 못한 말이 있다. 이런 말에는 공허하고 진실이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웃느라 한 말에 초상난다"라는 속담이 있다. 성경에도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잠 12:18)"라고 지적할 정도로 말은 매우 무서울 수 있다. 그래서 말은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하며, 병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치료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듣는 말이 있다. "말이 씨가 된다"라고 하는 것이다. 말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어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에 생명을 부여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부정적인 말을 함으로써 실패의 열매를 거두기도 한다. 그 말대로 그 생각이 따라가고 그 삶이 종착역이 된다.
“혀는 배의 키와 같다”라고 하듯이 아무리 큰 배라 할지라도 모든 배는 키에 의해 방향이 결정된다. “나는 불행하다, 나는 절대 성공할 수 없어, 나는 감당할 수 없어” 등 아예 넘어지려고 작정하고 준비하고 있는 사람은 실패로 향하는 길을 닦고 있는 것이다. 말의 씨앗은 결국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그 내용과 똑같은 열매를 맺는다. 이처럼 우리가 긍정적인 말을 하면 우리 삶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펼쳐지며,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말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좋은 말은 아침 이슬과 같다. 이슬은 양은 많지 않지만, 식물에 큰 영향을 준다. 한 마디의 좋은 말은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으며 때로는 사람을 살리기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말이 깨끗하면 삶도 깨끗해진다. 말에는 생명력과 운동력이 있어 인간의 입에서 나간 말은 반드시 열매가 되어서 돌아온다. '입술의 30초가 가슴의 30년이 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명심하자.(2023.08.19.)
지금까지 똑같은 세상을 살아왔지만 요즈음 느끼는 것은 세상이 무서워졌다는 아픈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옛날에는 속도가 느리고 문명이 발달하지 못해도 나름대로 세상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희망을 키워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전과 달리 많이 성취된 부분이 있고 문명 혜택을 보면서 생활환경과 삶의 질이 좋아졌음에도 세상이 아름답다고 표현하기가 어려워졌다. SNS상에는 온갖 거짓과 가짜뉴스와 막말들이 넘쳐난다. 인권을 외치지만 보호받기 힘이 든다. 음주운전을 하지 말고 생명 존중 홍보가 지속되고 엄연한 법의 제도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술기운에 운전하여 사람의 생명을 잃게 할 뿐만 아니라 한 가정이 평생 아픔을 동반하며 살아가는 안타까운 일이 계속된다. 뉴스를 접하면 묻지 마 식의 이유 없는 살인과 여러 가지 정신적 결함으로 표출되는 살인, 아주 사소한 일에도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살인에 이르는 결과는 사회적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자극적인 요소들이 안방까지 침투하여 쉽게 흡수하게 되고, 평정심을 잃게 되는 요소가 많아졌다고 생각된다. 또한 자신의 이익과 소속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머리띠를 두르고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찌르며 구호를 외쳐댄다. 물론 이해되는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이제는 조급한 세상의 조류에 따라 참지 못하며 자신의 기질과 성질이 여과 없이 분출된다.
절제(節制)란 인간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덕목의 하나이다. ‘절제는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거나 제어함이며 조정 또는 자발적 자제로 정의된다.’ 감정을 절제하고, 말을 절제하고, 술을 절제하고, 욕구를 절제하고. 표현을 절제하는 다양한 방법이 세상을 아름답게, 생활을 아름답게 하는 인간의 덕목이라 하겠다. 사람 중에는 절제하지 못함으로 자신의 삶을 다스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사람들이 있으며, 절제를 잘함으로써 자신의 삶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을 다스려 자신감과 내적 안정감이 가져오게도 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절제에 실패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정의 노예가 되어 살 때 절제할 수 없다.
산다는 것은 하나의 투쟁이며 치열한 전투이다. 죽은 사람에게는 싸움이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끊임없는 싸움이 있다. 선과 악의 갈등 속에서, 스스로 자신과의 부단히 계속되는 싸움이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절대로 패할 수 없다. 성경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節制)하나니 …”라고 말씀하였다. ‘절제’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알맞게 조절하고, 방종에 흐르지 않도록 감성적 욕구를 이성으로써 제어하는 일을 뜻한다.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에 고린도에서는 올림픽과 같은 이스무스(Isthmus) 경기가 매 3년 개최되었다. 여기에 참석한 경기자들은 10개월간 엄격한 훈련을 한 후에야 경기장에 나설 수 있었다. 그들은 먼저 규약에 복종할 것을 서약하여야 하고, 코치의 지도와 훈련, 식사, 잠자리, 오락, 휴식 등 일체에 관하여 통솔되고 매도 수없이 맞기도 했다. 경기에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많이 참아야 하고 더위와 추위를 겪어야 하고 사랑과 술을 끊어야만 했다. 바울은 이 의미를 알기에 이러한 극기와 자제가 필요함을 경기자를 통해서 절제를 강조한 것이다. 승리는 요행이 아니다. 철저한 절제에 이르게 될 때 주어지는 상급이다. 이스무스 경기의 승리자에게 솔잎으로 만든 면류관을 머리에 씌워 주었다. 이처럼 썩지 아니할 생명의 면류관을 쓰기 위해서도 극기와 절제가 필요함을 신앙의 방법으로 교훈해 준다.
절제는 자동차의 브레이크, 제동 장치와 같다. 우리가 항상 평평한 길로만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리막길을 달릴 때도 있다. 브레이크를 안 밟으면 사고가 나서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다. 인생을 경주할 때도 커브 길, 내리막길을 만나게 되듯, 그때마다 절제의 브레이크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살이의 모습이다. 가야 할 곳이 있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 해야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말이 있다. 해야 할 행동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있다. 맛있는 음식에 양념이 적절히 스며들 듯이 모든 일에 절제가 양념처럼 들어가 멋있는 인생의 모습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2023.08.18.)
이 세상에 상처가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듯이 열등감(劣等感)이 없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다. 어떻게 보면 우리 안의 있는 열등감은 가장 큰 상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막스웰 멀츠(Maxwell Maltz) 박사는 "세상 사람 중 적어도 95%가 열등감의 희생양이 되어 고통을 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5%의 사람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열등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하였다. 열등감(劣等感)이란 ‘자기의 처지, 신분, 학식 따위가 다른 사람보다 낮고 보잘것없다고 느끼는 마음가짐’이라고 표현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을 자신과 비교하여 자신을 무능,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는 만성적인 자기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열등감의 발생 원인을 아들러(Adler)는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신체적 결함에 의해 생긴 기관성 열등(organ inferiority)이며 둘째는 응석받이(pampering)로 자기 자신에게만 몰입되어 있어. 베풀 줄 모르며 관심의 중심에 서지 않으면 유기된 느낌을 받는 것과 셋째는 무관심(neglecting)으로 역기능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게 많이 보이는데, 사랑과 관심, 돌봄을 받아본 경험이 없어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가 결국 자신의 능력을 평가절하하며 사회에서도 관계를 맺지 못하고 소외되며 자아존중감이 없어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면으로 들어가 보면 열등감이라는 게 가장 단순한 면으로 표출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나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비교 또는 나의 환경과 다른 사람의 환경을 늘 비교 평가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는 임대 아파트에서 사는데 내 친구는 고급 아파트에서 살아야 하는가? 나는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저 친구는 대학원까지 나왔는가? 내가 가진 물질, 내가 가지고 있는 건강, 나의 능력, 나의 가문, 나의 외모, 나의 자녀를 비교하며 평가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를 의식한다. 이런 비교는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게 될 뿐만 아니라 원망과 불평이 생겨난다. 비교해서 내가 너보다 낫다고 생각되면 우월감이 생기고 교만해지고, 내가 너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면 열등감이 생기고 비굴해지며, 내가 너와 동등하다고 생각되면 조급증이 생기고 불안해진다. 이러한 생각은 모두 인생을 힘들게 한다.
중요한 것은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면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열등감을 계속 안고 있으면 인격적으로 성숙할 수가 없다. 열등감을 치유하지 못하면 그 열등감 때문에 쉽게 좌절하고 낙망한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이 많아진다. 또 열등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며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만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러므로 열등감은 반드시 치유되어야 할 내적·심리적 질병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비교를 통해서 도전을 받을 수도 있고, 자극을 받아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어떤 분은 이렇게 표현했다. “나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 앞에 섰을 때는 결코 아니다. 나보다 훨씬 적게 가졌어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 앞에 섰을 때이다. 그때 나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가난하게 되돌아 보인다.”실로 열등감과는 사뭇 격이 다른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가 자신에게 매기는 값에 달려 있다. 자신의 가치는 남들과 비교와 평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열등감이 아니라 자신감을 기르면 자신의 가치를 더 분명히 알게 된다. 이런 사람이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가치 있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 가치 있는 존재로 산다는 것은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의식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은 각자 서로 다르고 독특한 고유의 특징을 가진 사람으로 모두 가치 있는 인격의 소유자이기에 비참해지지도 말아야 하며 교만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를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고 수준이 높은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2023.07.30.)
어제는 유엔군 참전의 날·정전협정 70주년(2023.7.27) 기념의 날이었다. 비극적인 전쟁의 포화 속에서 알지도 못하는 KOREA라는 나라에 유엔군으로 참여한 젊은이들이 부상 또는 산화해 갔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세계 여러 나라에 빚을 많이 졌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나라를 위하여 도움의 손길을 펼친 이들의 고마운 심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정전협정 70년을 맞아 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최후의 보루였고 임시수도였으며 피란민 백만 명을 품었던 부산에서 처음으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6.25 전쟁에 직접 참전용사들이 찾아왔다. 의미를 부여하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유엔군이 처음으로 상륙한 곳이 부산 옛 수영 비행장이다. 지금은 국제적인 영화제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미군 '스미스 대대'가 유엔군 병력 가운데 최초로 부산 땅을 밟던 모습 등을 재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미국·영국·터키 등 22개 나라 구순을 넘긴 62명의 노병 참전용사들이 지팡이를 짚고, 휠체어를 타고 의장대의 호위를 받으며 행사장으로 들어설 때 그 순간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저 고맙습니다. 당신들 덕분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마음은 우리 국민들의 똑같은 마음이 아닐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노병들의 모습을 화면으로 한분 한분 만나볼 때 그들이 젊은 10대, 20대 앳된 젊은 모습이 70년이 지난 지금은 그들의 모습도 변하고 우리나라도 많이 변했다. 이전에는 이 땅에 용사로 왔지만, 지금은 노구를 이끌고 전쟁의 영웅으로 다시 방문할 때 만감이 교차한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이 땅에 온 영웅들이 젊은 시절 전투 현장에서 사선을 넘고, 전우를 잃으며, 치열한 전투 속에 그들의 심리적 압박과 공포는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노병들의 깊은 주름과 제복에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느껴진다.
오래전에 부산 남구 대연동의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가슴으로 깊이 느끼는 아픔과 고마운 감동의 여운이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전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공원에는 11개국 2,320명의 유엔군 참전용사들이 영면해 있으며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켜낸 분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3년간 22개국에서 195만 명이 전쟁의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으며 미군 3만 7천 명을 포함한 4만 1천 명이 전사하고 11만 명이 다치거나 포로가 되는 큰 희생을 치렀다. 꽃다운 나이에 자유 수호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그들을 우리는 진정한 영웅이라 부른다.
대통령은 연설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은 유엔군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피묻은 군복 위에 서 있습니다.”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전쟁이 멈춘 지 70년 만에 국제도시로 변신한 모습에 노병들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고, 참전국 대표는 참전용사들의 노고를 기리는 한국에 감사를 표했다. 우리나라가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유례없는 발전을 거두며 세계 속의 나라가 되었기에 참전용사 그들도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하며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더욱 잘되고 발전해야 할 이유이다. 원조를 받았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바뀐 것은 또 하나의 역사를 이룬 것이다. 생명 바쳐 우리나라를 지켰기에 오늘이 있으니 이제 받은 사랑의 빚을 세계에 나누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참전국의 미래세대와 함께 세계를 선도하는 자원이 되어 혈맹으로 맺어진 연결로 국제사회의 큰 지지를 얻어 가치 있는 일을 감당해 내는 위상을 나타낼 기회이기도 하다.
끝으로 2019년 영국의 대표적인 경연프로그램인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89세에 우승해 최고령 기록을 세운 참전용사 콜린 새커리가 유엔평화소년소녀합창단과 함께 아리랑을 열창했다. 이 또한 감동이다. 그는 말하기를 “전우들과 무슨 의미의 노래인지도 모른 채 기회가 될 때마다 함께 불러 이제는 한국을 떠올릴 때마다 아리랑이 생각난다”라고 했다. 아리랑은 6·25전쟁 때 국군과 유엔군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 우리는 아리랑 민족으로서 역사의 질곡이 있을 때마다 견디어 냈고 이기며 살아온 민족이었다. 자! 오늘 모두 힘차게 아리랑을 불러보자.(2023.07.28.)
부부(夫婦)란 결혼한 남자와 여자, 즉 남편과 아내를 묶어서 일컫는 말이다. 둘을 하나로 묶었다는 것은 ‘이인삼각(二人三脚)’ 경기와 같이 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인삼각(二人三脚)’이란 두 사람이 옆으로 나란히 서서 맞닿은 쪽의 두 발목을 함께 묶고 세 발처럼 뛰는 경기이다. 호흡을 맞추지 않으면 전진하기는커녕 넘어지기 쉬운 게임이다. 한편이 먼저 앞서도 안되고 뒤처져서도 안 된다. 이 게임의 특징을 보면 부부가 하나 되어 목적지로 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더디 갈 수 있을지 몰라도 중요한 것은 함께 꾸준히 달려가는 것이다. 부부가 서로 하나가 되어 걸음이 어긋나도 다시 보조를 맞추며 혹 걸음이 꼬여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 목적지를 향해 도달하는 인생의 모습을 바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체로 가정이 깨어지는 것은 한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원하기 때문이다. 요즘 이혼 사유 1위가 성격 차이를 꼽을 수 있다. 물론 각자 살아온 배경, 부부의 도리, 생활 능력, 자식 양육 등 수많은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지만 결국 서로의 성격적 요인으로 파탄에 이르게 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서로가 하는 말이 ‘너무 성격이 안 맞다’라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생각해 볼 때 부부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로 사랑하며 부부로 사는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게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모든 남편과 아내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인정받고 존중받으려는 근본적인 욕구가 있다. 남편이 인정받고 존경받기를 원하듯, 아내도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물론 사랑받고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인정받고 사랑받으려는 방법의 초점이 ‘나’란 존재에서 ‘너’에게로 옮겨질 때, 즉 남편이 받기보다 먼저 아내를 위하여, 아내는 나보다 먼저 남편을 위하여 사랑하고 존중하고 헌신한다면 똑같은 사랑이라도 감동과 행복의 물결이 그 가정에 들어와 기쁨의 헤엄을 칠 것이다. 먼저 받기보다 주는 것에 무게의 중심이 실려있다면 설사 성격 차이로 다소간 불편함이 있을지라도 섭섭함과 오해의 요소들이 마치 고체가 열에 녹아서 액체 상태로 되듯 고체처럼 굳었던 마음이 사랑의 열로 용해(鎔解)시키는 감동의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남자든 여자든 섭섭한 마음이 자리를 잡으면 후회의 감정이 싹트게 되고 배우자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심리학자 칼 융은 "모든 사람의 의식 속에는 끊임없는 비교의식이 헤엄을 친다. 이 비교의식만 버릴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범죄와 자살, 우울증 같은 고질적인 병폐들을 쉽게 고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는 비교가 아니라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솔직히 배우자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못할 수도 있다지만 나를 사랑하고 우리 가정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상대방의 행복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자세가 절대로 필요하다. 가정에 대한 책임, 반려자와 자녀들에 대한 책임은 자신의 평생 과제임을 가질 때 온전한 일치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책임지는 목표가 같아지면 방향도 같아진다. 걷는 태도도 같아진다. 보폭도 같아진다. 생물학적 일치를 넘어서서 화학적인 일치를 이루어 내는 부부의 모습이 마치 다리를 묶어 ‘이인삼각’ 경기와 같은 인생의 승리자가 될 것이다.
이런 제안을 해 본다. ‘이인삼각’ 경기처럼 열심히 살아온 배우자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장난삼아 배우자의 발을 씻겨 주자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발을 씻겨 주는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세족식"이라고 부른다. 결코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는 발을 직접 손으로 씻겨 준다는 것은 상대방의 가장 약하고 부족한 모습까지도 사랑하고 섬길 각오가 되어 있음을 뜻한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표현하셨던 방법 중에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이 있다. 배우자의 가장 연약한 부분까지 품을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랑이 바로 어떤 초콜릿보다 더 달콤하고 가슴 벅찬 사랑이며, 각별한 애정의 표현이 행복한 부부의 결승점이 되었으면 한다.(2023.07.27.)
우리 교회는 연고대 출신들이 많다. 이것은 필자가 크게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목이다. 어떤 사람은 ‘아니 농촌지역에 어떻게 명문대 출신이 많냐?’라고 이상하다는 듯 묻기도 한다. 그러면 다시 분명하게 응답을 한다. ‘맞습니다. 연고대 출신들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연고대 출신들이 많은 우리 교회 주변은 아주 농촌은 아니지만, 농어촌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이곳 거제제일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목회한 지 어느덧 34년이란 세월을 은혜로 달려왔다. 교회의 특징이 있다면 113년의 긴 역사가 있다. 사람들은 오래된 역사를 두고 감탄하기도 한다. 그런데 긴 역사를 자랑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역사는 있는데 전통이 없다’라고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물론 이 말은 나의 부족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는 하나 보편적으로 여러 목회 현장은 생각보다 매우 어렵고 예측할 수 없는 반응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성직자로서 소명을 받아 목회 현장에 있지만, 목회의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 문제에 에너지를 쏟아붓게 되는 것이 매우 안타까운 심정이다. 신앙공동체 구성원들의 신앙관과 일반상식적인 면이 왜 교회에서는 적용되지 않을까? 하는 물음이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디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교회나 사회나 다종다양한 인적 속성을 가진 사람이 모이는 곳이기에 여러 의견이 표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과 인격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교훈과 훈련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변화되지 않을 때는 많은 회의를 느낀다. 그럴 뿐만 아니라 내적 상처의 아픔까지도 감당해야 한다. 이를테면 사회생활용 인격, 바리새인(Pharisees)적 신앙으로 객관화가 안 된 언행, 자아가 거침없이 크게 나타날 때는 주님이 이 자리에 오셔도 못 말리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는 교회에서 아픔과 상처들이 많다. 샘물 넘쳐나는 곳에서 목말랐고, 능력과 기적 앞에서 메마르게 살았고, 축복 앞에서 저주스럽게 살아가기도 했다. 응답 주시는 주님 앞에서 무응답으로 살아가는 일들도 경험한다. 무슨 말을 더해야 하는가? ‘엎어진 둥지에는 성한 알이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 공동체는 모두 몸살을 하게 된다.
세상은 예수 믿는 당신들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항변한다. 그들이 말은 하지 않지만, 예수 믿는다고 달라지는 것이 뭐냐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그리스도인의 위상은 다 땅에 떨어져 버린다. ‘오!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고 외치며 참 많이 울며 부르짖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함께 하는 성도들과 멍든 가슴을 안고 기도했다. 한나(Hanna)의 울부짖는 기도처럼, 히스기야( Hezekiah)의 절박한 기도처럼 많이 울었다. 의미 없는 고난이 없듯이 힘겨운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부족함을 내어놓고, 참회의 눈물이 양식이 되다시피 메마른 광야 같은 세월을 경험하였다. 여기에서“연단(鍊鍛)과 고난(苦難)”이라는 학교를 함께 걸어왔기에 “신앙의 연고대 출신’이라고 부른다. 연고대 출신들은 은혜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다. 세상의 학벌은 없어도 신앙의 코스인 연단(鍊鍛)과 고난(苦難)의 공부를 하였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113년 전, 이 땅 위에 세워진 교회! 일제강점기 때 교회의 박해를 이겨내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뜨겁게 기도의 초석을 다진 여기에 아담슨(孫安路, Adamson Andrew) 선교사를 기억한다. 그는 중국 북부에서 영국 성서 공회 선교사로 5년간 활동, 인도 장로교신학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영국에 일시 머물다가 호주 빅토리아 청년연합회가 파송하여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4년 5월 20일 내한하였다. 1894년부터 1909년까지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1910년부터 1914년까지는 마산을 중심으로 서부 경남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거제제일교회의 태동을 알리는 역사적인 시간, 1910년 3월 15일 거제면 동상리 하대원 씨 행랑방에서 아담슨 선교사와 8~9명 청년들과 함께 교회가 시작되었다. 긴 역사 속에 담긴 성령의 임재하심은 연단과 고난의 세월 속에 지켜온 신앙의 유산,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 되는 것, 이 모두가 은혜이며 진행형이다.(2023.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