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겉으로 보면 건강하게 보인다. 그러나 속 내면을 보면 연약함이 많다. 이른바 환자이다. 당뇨(糖尿), 고혈압(高血壓), 고지혈증(高脂血症)이다. 스스로 여유를 가지려고 하는 뜻에서 3종 종합선물 세트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러한 질병이 올 수 있지만, 가족력 때문이기도 하고 아니면 목회 활동을 하느라 건강관리를 소홀히 해서 그런지 몰라도 나타난 질병의 현상은 아직 젊다고 하는 시절부터 짊어지고 오늘날까지 살아왔다.
처음에는 당뇨(糖尿)에 관한 이해도가 너무 없었다. 당장 나타나는 반응이 없어서였다. 당뇨(糖尿)는 혈액 내의 포도당 농도가 높아지면서 문제가 되는 질환이며 질환의 뜻 그대로 소변에 당이 함유되어 나오는 질환을 의미한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누구나 하는 말이 당뇨는 평생 관리해야 하고, 합병증이 더 무섭다는 것에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로는 우울한 생각으로 인해 의욕을 잃기도 하고 감정조절에 신경을 써야 했다. 부정적인 생각에 두려움, 불안들의 요소가 신체적 정신적 기능까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당뇨로 인하여 인생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시 그날 밤 깊은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내가 이러한 질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뇨로 인한 합병증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미안하고 죄송하고 후회스럽고 안타까움이 나를 질책하게 했다. 더 잘 간호해 드리고, 마음의 위로와 든든함을 보여드려야 했는데 철없는 나의 모습에서 병상의 어머님은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우리는 누구나 건강하기를 소원한다. 요즘 모두의 공통된 관심사가 건강이다. 건강을 잃으면 다 잃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문명과 의술이 발달할수록 더 많은 질병이 있음은 안타까울 뿐이다. 어느 가정에 질병에 있는 자녀가 있다고 생각해 볼 때, 게다가 불치병에 놓여있는 상황이라면 어떻겠는가? 상상도 하기 힘든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가족이 있다면 그 집에 1년 365일 평안한 날이 없을 것이다. 성경 마태복음 15장 21절 이하를 읽어보면 귀신 들린 딸을 가진 가슴 아픈 가나안 여인을 볼 수 있다. 이 여인은 주님께 나아와서 “내 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지 않고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한 것을 보면 딸의 고통과 아픔이 곧 어머니의 고통이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누구보다도 딸의 아픔을 부모가 알기 때문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제 병자(病者)에 대한 부모의 마음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목회 현장에서 교우 중 그 누가 아파하면 나도 아프다. 병원을 방문하거나 집을 방문하여 위로와 평안을 빌어주며 치유되기를 기도드린다. 사도 바울은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라고 했다. 이처럼 내가 약할 때 겸손해지고, 내가 약할 때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아는 자로 위로와 희망을 나눌 수 있기에 인간 됨에 성숙을 가져오니 나의 약함과 육신의 질병은 꼭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유익을 가져왔음을 고백할 수 있다.
나에게는 잊지 못할 두 분의 의사가 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매년 편지를 쓴다. 부산 SM 병원 내분비내과 L.C.Won 과장이다. “L.C.Won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저에겐 당뇨라는 병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 병으로 인해 겸손을 배우며 조심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저와 비슷한 사람들을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며 격려합니다. 특히 과장님을 만나 오랜 세월 동안 인격적인 의료의 손길을 내미시는 고마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가족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 바라며 2023년 새해에도 늘 강건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또 다른 의사는 우리 동네 OJ 의원 K.M.D 원장이다. “지역에 살면서 Kang.M.D 원장님을 찾을 때마다 편한 마음이었습니다. 방문 때마다 정성으로 처방해 주시니 사랑의 빚을 많이 졌습니다. 다정하게 헤아려 주시는 손길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원장님과 직원들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2023년 새날에도 좋은 일들이 많기를 응원합니다.” 심중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다. (2023.05.25.)
히브리어 '카보드'(kabod,כָּבוֹד)의 어근은 ‘무겁다’라는 뜻이다. '카보드'(kabod,כָּבוֹד)는 명예나 고귀함이나 권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카보드'(kabod,כָּבוֹד) 주님의 영광을 표현하는데 가장 자주 쓰이는 낱말로서 '무게', '영광', '명예'라는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또한 '카보드'(kabod,כָּבוֹד)와 같은 어근에서 나온 낱말로 '카베드'(kabed,כָּבֵד)가 있다. 사람이나 동물의 간(肝)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히브리어로 간은‘묵직함’이란 말과 같다. 실제로 간은 꽤 무거운 장기이기도 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므로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그러므로 "공경(恭敬)"은 히브리어로 '카보드'(kabod,כָּבוֹד)이며, '카베드'(kabed,כָּבֵד)는 "간(肝)"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려주듯 “네 부모를 공경(恭敬)하라”라는 말은‘예의 바른 태도로 받들어 모심을 의미’하는 사전적 차원을 넘어 원어에서 뜻하는 바를 새겨볼 때 “공경한다”라는 말의 “공경(恭敬)”은 “간(肝)”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간(肝)”은 사람의 모든 장기 중에서 가장 무거우며, 생명과 직결이 되어 있다. 그래서“간(肝)”에 병이 생기면,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부모를 자신의 몸에 가장 소중한“간(肝)”과 같이, 귀중하게 여기고 잘 모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간(肝)은 우리 신체의 장기 중에서 해독 작용을 하는 그 역할도 중요하지만, 장기 중에서 제일 무거운 장기이기에 부모를 비중 있게 생각하고 중요하게 여기고 가벼이 여기지 말고 무겁게 대우하라는 것이다.
한국기독교는 선교 초기에 많은 핍박을 받았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 불효종교라고 낙인을 찍었다. 물론 시대적 문화의 영향도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기독교는 부모에게 효(孝)를 가르치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주신 십계명 중 5계명에 해당하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는 말씀은 인간에게 주신 가장 첫째 계명에 해당하며 이는 모든 사람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성서는 가르침은 부모에게 효도를 다 하라고 가르침은 더욱 분명하다.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 23:22). 나를 낳아 생명을 주신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이며 이는 가정의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의 법칙을 말한다. 가장의 권위가 세워지지 않는 가정에는 질서가 세워지지 않고, 가정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가정이 될 수가 없다. 그리고 늙은 어머니를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지 말라는 뜻이다. 자식이 어릴 때는 어머니를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하다가 장성한 다음에는 어머니를 무시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라고 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모를 통해 자식에게 생명을 부여해 주셨기 때문에 마음에 새기고 순종할 것을 가르친다. 자녀 된 자들의 마땅한 기본 도리임을 뜻한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만일 새가 된다면 무슨 새가 되고 싶니?’ 많은 아이가 공작새가 되고 싶다고 하였다. 어떤 아이들은 꾀꼬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또 종달새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한 어린이가 말하기를 ‘선생님, 저는 까마귀가 되고 싶어요.’ 모두가 웃었다. 이상하게 여긴 선생님이 그 이유를 물었다. 그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새들은 예쁘기도 하고 노래도 잘하지만, 부모에게 무관심해요. 그러나 까마귀는 모양은 흉하지만 자란 뒤에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대요. 또 어떤 일이 있어도 어미보다 높은 가지에 앉는 법이 없대요. 나는 그런 까마귀가 좋아요.’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이 있는데,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효(孝)라는 뜻으로, 자식이 자란 후에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 효성을 이르는 말이다. 햇살 비치는 오월에 부모님을 그리며 공경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2023.05.19.)
지난 세월 돌아보면 우리는 부부(夫婦)가 되어 가정을 이룰 때에 어떻게 부부로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교육을 받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저 나이가 차면 장가가고 시집가야 하는 생각이었고 그리고 서로가 좋은 사람 만나야 할 텐데 하는 그러한 생각의 수준이었던 것 같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어야 하는 것은 알지만 진작 남남이 만나 부부로서 조화롭게 사는 방법에 대해 전혀 대비하지 못한 것이었다.
마치 아이들이 냉장고 문을 열면 항상 음료나 간식들이 저장되어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실 수 있는 것 같이 결혼하고 나면 그냥 행복한 생활이 저절로 되는 줄 알았다. 가족 중 누군가가 냉장고에 무엇이든 채워 넣었을 때 필요에 따라 원하는 물건을 얻을 수 있듯, 부부의 생활에도 여러 가지 배려와 헌신, 인내와 사랑의 요소들을 채워 넣어야 하는 이치를 잘 모른 채 부부의 삶을 살아가니 남편과 아내로서의 부부생활과 당면한 가정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문제에 많은 시행착오와 예상하지 못했던 힘겨운 일들을 경험하며 긴 시간 학습을 통해서 부부의 가치를 소중히 얻게 되었다.
부부(夫婦)란 남편과 아내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부부(夫婦)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부부로 사는 하루하루를 귀하게 여기며 행복하게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뒤늦게 체험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부부가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사전학습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시대가 변해 요즘은 부부예비학교, 신혼부부학교, 행복한 부부학교 등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배우자에 대한 이해와 서로의 대화법을 통해 서로 인정해 주는 방법과 부부관계를 다시 한번 돌아보며 부부의 사랑을 회복하고 증진 시킬 수 있는 감동을 자아내는 교육 현장이 많이 생겨 그나마 참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해마다 오월에 부부의 날(Couple's Day)을 맞이한다. 5월 21일이다. 여성가족부 주관으로 건전한 가족문화의 정착과 가족해체 예방을 위한 행사를 개최하는 대한민국의 기념일이다. 2003년 12월 18일 민간단체인 '부부의 날 위원회'가 제출한 '부부의 날 국가 기념일 제정을 위한 청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결의되면서 2007년에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다. 가정의 달인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된다'라는 뜻이 들어있다. 제정 목적은 부부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화목한 가정을 일구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부부의 날은 핵가족시대의 가정의 핵심인 부부가 화목해야만 청소년문제, 고령화 문제 등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법정기념일이다.
소중한 만남의 부부(夫婦)는 항상 서로 마주 보는 거울과 같단다. 내가 웃고 있으면 상대방도 웃고 있고 내가 울고 있으면 상대방도 울고 있는 모습이 나의 또 다른 얼굴이기에 거울과 같은 것이라 표현한다. 부부(夫婦)의 도(道)를 지키고(夫婦有別) 평생을 반려자로 살아가야 하지만 부부는 무촌이라고 한다. 한 몸을 이루어 너무 가까워서 촌수로 헤아릴 수 없어서 그렇다지만 반대로 돌아서면 남이 되니 촌수가 없다고 한다. 촌수와 상관없이 짧은 세월 모진 풍파를 이겨내며 함께 헤치고 살다가 어느 날 부부 중 먼저 세상을 떠날 수 있는 부부는 지구상에 80억분의 1 가운데 만난 둘도 없는 소중한 한 사람이기에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한다.
새는 두 날개가 서로 같은 방향으로 균형을 이루며 날갯짓하고 있기에 날 수 있다. 한쪽 날개가 다른 한쪽 날개를 이해하며 보조를 맞추어 나란히 날갯짓하는 새의 모습을 떠올리면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가! 같은 하늘 아래 사는 우리, 서로 비상할 수 있도록 보조를 맞추며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는 새가 되어야 한다. 혼자서 마음대로 날갯짓하다 결국에는 추락하고야 마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 21일은 둘이 하나 되는 부부(夫婦)의 날이다. 부부는 그 날개 위에 자녀들을 태우고 창공을 나는 두 날개이다. 튼튼한 두 날개로 맞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모습처럼 둘이 하나 되는 부부의 소중한 의미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진솔한 마음을 표현해 본다.(2023.05.16./2023.05.22.거제신문)
기독교는 교회력에 의해 전통적으로 지켜오는 여러 절기가 있지만, 가톨릭과 개신교가 동시에 지키는 절기가 있다. 바로 부활절(Easter)과 성탄절(Christmas)이다. 부활절과 성탄절은 본래 기독교 고유의 최대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성탄절만큼은 비기독교인들까지도 지키는 유일한 기독교 행사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성탄절은 같이 기념하면서 부활절은 기념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부활절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남을 기념하는 날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자 중심 교리이다. 부활절을 오래전부터 지켜왔던 다른 나라들의 표기는 이와 다르다. 영어는 'Easter, 라틴어는 'Pascha', 그리스어는 'Πάσχα'(Pascha)인데,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Pass over(유월절)'와 같은 뜻으로, 유대인 사이에서 전승되는 유월절이 그리스도교에서 부활절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활에 관하여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3, 4절에 보면“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말씀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게바에게 보이시고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시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다른 사도들에게 보이시고,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 같은 사도 바울에게도 보이셨다고 증언한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으니까 그다음에는 우리를 죽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문을 굳게 닫고 숨어 있었는데 그 자리에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셔서“두려워 말라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었다. 막달라 마리아의 눈에 있는 눈물을 거두어주시고 기쁨을 주신 분이 바로 부활의 주님이다. 엠마오로 두 제자가 절망 속에서 내려가고 있을 때 뭔가 낯선 사람이 동행한다. 이분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인데 두 제자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 사람들아!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3일 만에 부활할 것을 성경은 말씀하지 않았느냐?” 성경 말씀으로 깨우쳐 준다. 그들이 말하기를“저 낯선 사람이 우리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칠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절망에 있던 저들에게 산 소망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부활의 내용을 일부 서술하였다. 이번엔 이런 이야기로 쉽게 접근해 보려고 한다.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고 있었다. 해 질 무렵이 되자 메뚜기가 이렇게 말했다. “얘!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다시 놀자.” 하루살이가 물었다. “내일이 뭐야?”“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날이 오는데, 그게 내일이야.” 그래도 하루살이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메뚜기가 이번에는 개구리와 친구가 되어 놀았다. 어느 날 개구리가 말했다. “날이 추워지려고 하니까, 그만 놀고 내년에 다시 놀자.” 메뚜기가 물었다. “내년이 뭐야?”“겨울이 끝난 다음에 날이 따뜻해지려고 할 때, 내년이 오는 거란다.” 그렇지만 메뚜기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속에서 놀던 개구리 한 마리가 고기들 보고 말하기를 '야~ 고기들아, 나 밖에 좀 나갔다가 올게' 하니까 고기들이 말하기를 '밖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개구리가 하는 말이 '야! 저 물밖에는 꽃도 피고 나비도 날고 새도 날고 하늘에는 해도 있고 밤에는 별과 달이 있단다'라고 말했다. 고기들은 도대체 개구리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던 것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죽은 뒤에 영생이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이 세상밖에 모르는 사람은“영생이 뭐야?”하고 물을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부활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표제요, 내용이며, 핵심이다. 원하기는 이 부활 신앙으로 이 땅에서 아무리 불행과 시련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기를 간절한 바람과 일상의 어두운 장막이 걷히기를 기도드린다.(2023.04.13./2023.04.17.거제신문)
1919년 3.1만세운동이 시작된 직후 기독교인들에게 ‘독립단 통고문’이라는 문서가 배포되었다. 일종의 행동강령과 같은 것인데 "1919년 3월 평남 강서지역에 '독립단 통고문'이라는 전단지"내용은 이렇다.
“우리 존경하고 고귀한 독립단 여러분이여, 어떤 일이든지 일본인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때리지 말라. 이는 야만인이 하는 바니, 독립의 주의를 손상할 뿐이니 행여 각각 주의할지며, 신자는 메일 세 차례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며 매일 성경을 읽되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야 12장, 수요일은 신명기 28장, 목요일은 야고보서 5장, 금요일은 이사야 59장, 토요일은 로마서 8장을 돌아가며 다 읽을 것이라.”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하게 체포를 피한 뒤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밀알이 된 김병조(金秉祚 1877~1950) 목사가 1920년‘한국독립운동사략( 韓國獨立運動史略)’ 상편에 수록한 내용이다.
암울하고 힘겨웠던 시대를 살아갔던 우리의 선배들은 고난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신앙인으로서 나라를 위한 민족 독립운동의 시대정신을 보여주었다.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서 복음의 정신을 담은 행동 지침을 제시하였다. 주권을 잃고 국운이 나락에 떨어져 소망이 없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선배들의 영성은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i)의 영성과 다를 바 없는 철저한 비폭력 저항운동이었으며 신앙적 행동 지침이었다.
‘독립단 통고문’을 더 상세히 들여다보면, 매일 3시에 기도하고, 주일은 금식하고, 매일 성경을 읽으라는 것이다. 매일 성경을 읽는 내용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화요일은 예레미야 12장, 유다가 멸망한 원인에 대한 설명. 수요일은 신명기 28장,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에게 침략받아 고통받게 되리라는 예언. 목요일은 야고보서 5장, 고난 겪는 기독인들에게 기도와 인내할 것을 권면. 금요일은 이사야 59장, 죄지은 백성이 회개할 때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다는 예언. 그리고 토요일에는 로마서 8장, “지금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미래의 영광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내용이다.
말씀과 기도를 통한 3.1운동 참여는 기독교인들의 독특한 것이었다. 고난 중에 소망을 잃지 않고 3.1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또한 한국 기독교인들은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신앙 운동으로 이해하였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은 구체적으로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하였고, 이때 이웃이란 일제라는 강도를 만나서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는 자기 동족이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민족 구원 신앙의 기초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의 기도가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기도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는다.
이는 3.1운동 과정에서 기독교회가 민족운동을 신앙고백 위에서 실천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 역사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대비하고 있던 모습을 신앙적으로 승화하여 보여준 것이다. 이만열 교수는“기독교의 항일독립 운동은 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킨 신앙 운동이었다”라고 밝혔다. 또한 김명실 교수는 "3.1운동을 기억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일본의 억압에 저항했던 사건을 넘어서 오늘날도 여전히 존재하는 권력에 의해 자유가 제한되는 모든 억압에 목소리를 내는 것까지 상기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일제강점기의 참혹한 시절에 애국 신앙으로 분연히 일어섰던 신앙 선배들처럼, 이 민족을 다시 살릴 하나 된 외침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기에 이념, 정파, 지역, 세대 간을 뛰어넘어 나라 사랑의 새로운 물결이 형성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토해본다.(2023.02.28./2023.03.06.거제신문)
많은 분이 하소연한다. 구호처럼 들려오는 소리가‘월급 빼고 다 오른다’라는 것이다. 갑자기 치솟는 물가로 힘겨워하는 서민들의 탄식 소리는 아픔으로 느껴진다. 높은 물가 오름세를 주도하는 요인으로 에너지, 식료품 가격, 수요자 측 물가 상승압력, 공급 병목 현상, 임금 상승압력, 주거비와 유동성 등 여러 요인이 있다. 특히 에너지 가격은 원유, 천연가스 등 원자재 가격이 상승세가 지속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물가상승을 주도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며칠 전 방한했던 기타 고피나트(Gita Gopinath) 국제통화기금(IMF) 수석부총재는 한국은 경제 기초여건이 탄탄하고 통화재정정책도 잘 뒷받침되고 있으며, 외환보유고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25% 수준으로 두텁다며 악재가 발생해도 대응할 수 있는 정책 여력이 충분하다고 진단했다. 그나마 세계 경제 흐름을 주시하는 전문가의 관점에서 평가한 내용이어서 참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새해가 되었지만 지난 2022년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고금리와 경제 침체는 멈추지 않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물가안정 대책을 바라는 국민의 바람은 장바구니 물가부터 잡아달라는 것이다. 그만큼 먹거리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식품값이 크게 오른 상태에서 추운 겨울에 전기료와 가스요금 등 공공요금 가격까지 오르면서 서민 취약계층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소득이 낮을수록 해당 항목이 소비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어려운 세월을 헤치고 살아왔지만 우리는 이럴 때 더 힘들어하는 것 같다.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아무리 내가 잘한다 해도, 나를 힘들게 하는 요소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을 때, 그리고 누구의 도움조차 받을 수 없는 상황일 때, 더 나아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문제가 구조적으로 변화되기가 어렵다고 생각될 때, 우리의 에너지는 제로가 되다 못해 마이너스가 된다.
사람은 꿈과 희망을 먹고 사는 것이다. 지금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앞으로 나아지고 달라지고 좋아진다는 확신만 있다면 얼마든지 견디고 기쁘게 참을 수 있다. 문제가 크고 많아서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문제 속에 희망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사방이 가로막혀 힘든 것이 아니라 가로막힌 사방으로 인하여 낙심이 되기 때문에 힘겨운 것이다. 상황과 현실이 최악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 속에서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낙심만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죽고 싶은 상황에서도 살고, 막혀도 길이 있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절망'이라 했다. 절망은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희망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준다.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살도록 창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는 두려움, 불안, 초조, 염려들은 만인의 적이다. 그래서 성경은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이런 말씀을 강조한다. 예레미야 29장 11절 말씀을 보면“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가 살아가노라면 뜻대로 되지 않아 의기소침해지고 자신감을 잃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가장 소중한 도움은 깊은 사랑에 우러나오는 누군가의 격려다. 그 격려는 암울한 정신에 깊은 용기를 던져주고 오랜 세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주는 기둥이 된다. 우울할 때도 상대에게 격려를 보내고 나면 오히려 자신이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격려란 아주 작은 말 한마디에서 비롯된다. 격려는 따뜻하게 해주는 손길이며 서로를 행복하게 하는 큰 선물이 된다. 터널 속에서는 하늘을 볼 수 없지만, 터널을 지나고 나면 하늘이 다시 보이듯 당신이 터널을 지날 때 밝은 하늘을 볼 것이다.(2023.02.02./2023.02.06.거제신문)
몇 주 전만 해도 동네 들판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황금 들녘이다. 황금색 도포 자락을 주단처럼 깔아놓은 듯 그 풍성함과 아름다움에 겸허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들녘을 만들었을까? 한 톨의 쌀이 만들어지기까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많은 시간과 수고로움이 따라야 하는지를 알기에 우리는 매일 먹는 밥상 앞에서 주기도문에 기록된 말씀을 반복하듯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감사기도를 드린다.
올해도 여전히 낙엽은 지고, 여전히 국화꽃은 피었다. 서정주 시인은‘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와 애씀, 그리고 인내의 시간이 필요한가를 표현했다. 열매는 어느 날 갑자기 열리는 것이 아니라 씨앗이 땅에 심어져 발화되어야 하고,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며, 땅속에 스며든 영양분과 수분을 먹고 자란다. 겨울의 추움과 봄의 따사로움,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을 견뎌야 하며, 나무는 세월을 먹고 드디어 열매가 열릴 정도로 성장한다.
우리가 먹는 가을 사과나 단감에는 이러한 수고와 노력, 애씀의 시간이 필요했고, 때를 따라 비를 내리며 햇빛과 공기 등 자연을 돌보시며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에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 특히 우리 앞에 놓인 과일들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지속되는 하나님 사랑의 상징이며, 시련과 시간을 넘어 희망을 파종해야 하는 우리의 소망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몇십 년 전보다도 훨씬 생활이 윤택해졌음에도 사람들은 감사를 잊고 산다. 당연한 것처럼 생각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만과 불평이 더 많아졌다. 사람들의 마음도 삭막함을 느낀다. 왜 감사하지 못할까? 내게, 있는 수만 가지보다 나에게 없는 한 두 가지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 감사하지 못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니 교만해지는 인간의 부족한 심성 때문일 것이다.
이 계절에 모든 교회는 추수감사절이라는 큰 축제의 행사를 맞이하였다. 이번 감사절에는 이러한 생각이 마음을 두드린다. “감사하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하나님께 더 많이 감사하지 못한 것과 이웃에 대해 더 많이 나누지 못한 것에 회개와 반성의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환경이나 조건을 보면 도저히 감사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오늘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감사의 조건을 찾고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감사 위에 감사’라는 곡의 가사 중 “감사 위에 감사를 덮을 때 은혜 위에 은혜가 쌓이네” 그리고 손경민의 ‘은혜’라는 곡의 가사 중 “내가 누려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소”라는 글귀가 감동을 준다. 이 두 곡의 공통점은 인생의 메마른 심령을 감동으로 촉촉이 적혀주는 눈물과 같은 진주와 같기에 이것을 우리의 일상 가운데 은혜라고 표현한다.
은혜(恩惠)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랑으로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 인류에 대한 신의 사랑” 또는“마음에 두어 애틋하게 생각하다, 인류에게 사랑으로 베풀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恩惠)는‘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받는 것’이다.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으로 받은 은혜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은혜란‘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며, 본질적으로 공로 없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소중한 것을 공짜로 받고도 자기 것처럼,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아왔다. 물, 공기, 일용할 양식 등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빚지고 사는 것이다. 당연한 것처럼 여긴 것들에 대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다는 고백을 할 때 비로소 마음과 생각이 겸손하여질 것이며, 새로운 삶의 희망이 생겨 날 것이다. 이런 사람은 비록 세상에서 힘겨운 일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닥쳐도 살아있음을 감사와 은혜로 노래하며, 소망에 찬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매일 아침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나 됨을 깨닫고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을의 끝자락에서 노래를 불러본다.
“감사 위에 감사를 덮을 때 은혜 위에 은혜가 쌓이네~”(2022.11.25./2022.11.29.거제신문)
여름의 긴 터널을 통과하니 가을이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더위에 지치고 비와 태풍으로 마음조차 상한 이들에게도 찾아온 계절은 하늘이 얼마나 높고 맑고 청명한지 딴 세상에 사는 느낌이다. 이맘때가 되면 언젠가부터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라는 명품과 같은 시를 떠올린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그런데 정말 마른나무 끝에 다다른 까마귀처럼 홀로 서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에게 가을 하늘은 어떤 색깔로 비칠까? 꼭 가을이 와서 기도하는 게 아니라 답답한 사람은 이것저것 가릴 겨를도 없이 그렇게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자만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도 절망한다. 연약함 때문에 절망하는 것만이 아니라 건강한 자들도 절망한다. 결혼을 못 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한 사람도 절망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모순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은 이래도 절망하고 저래도 절망한다. 풍요지수나 지식지수가 높아질수록 절망 지수 또한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절망에서 예외 될 사람은 없으며 절망의 영향권 안에서 벗어나 절망의 사각지대에 숨을 자가 없다.
이처럼 우리가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절망을 만나게 된다. 굳이 무엇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냥 사는 게 힘이 든다. 급변하는 세상에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중압감이 우리의 심장을 압박한다. 절망의 수렁에서 헤매다 보면 일어날 기력조차 없어 기도하는 힘이 없을 때도 있다. 본래 수렁의 특징은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면 더 깊이 빠져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그것 또한 불안의 수렁이 되어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빨려들게 한다.
창조 질서에 따라 어김없이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며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듯, 이 순환의 원리를 통하여 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가르침을 주는 귀한 성서에 기록된 말씀을 상고해 본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1-8).
절망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러나 회복의 때를 갈망해야 한다. 그래서 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 되게 하는 자원이다. 앞서 말한 김현승 시인의 말처럼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라는 문구는 동의어로 해석이 될 뿐만 아니라 홀로 기도하는 겸허한 인생의 모습을 찾아가는 통로일 것이다. 이제는 갈 데가 없는 마른 나뭇가지 끝에 다다른 까마귀와 같이 벼랑 끝 같은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골프를 치려면 값비싼 골프채가 필요하지만, 기도에는 아무런 도구가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테니스를 치려면 파트너가 필요하지만, 기도는 파트너 없이 혼자 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며 언제라도, 어디서든 가뿐하게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이다. ‘주여,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올가을에는 자연도 힘겹게 지나온 지난 무더운 여름을 떨쳐버리고, 모든 이들이 가을 하늘이 파랗다는 것을 함께 느끼며 가을의 정취를 맛보는 기도의 계절이 되기를 바라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겸허히 고개 숙여 두 손을 모아 본다.(2022.10.13./2022.10.17.거제신문)
오늘 많은 사람이 위로받고 싶어 한다. 그만큼 세상살이가 고단한 것이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다. 일일이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지만, 불쑥불쑥 닥쳐오는 고난으로 괴로워한다.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 질병, 실패, 불화, 갈등, 죽음 등이 우리 삶 가운데 다가올 때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묘수를 찾기 어려운 세상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위기 상황에 맞닥뜨린다. 터가 무너져 버린 상황에 다 상실한 것처럼 그저 허우적대며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 애쓸 뿐, 정작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인지도 명확하지도 않다. 그래서 위로를 받고 소망을 얻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위로(慰勞)라고 하는 말은‘남의 괴로움이나 슬픔을 달래 주려고 따뜻한 말이나 행동을 베풂’이란 뜻으로 마음을 즐겁게 해주며 괴로움과 슬픔을 어루만져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다. 즉 ‘내가 힘들 때 네가 한 말들은 나에게 위로가 됐다’라고 하면 어떤 어려움도 살아갈 소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왜 그럴까? 서로 배려하고 어려움과 아픔의 공감에 치유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아파함으로 위로받고 강해진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코로나19 변이 바이러스 오미크론 등 지금도 무섭게 주변에 서성이며, 운송 수단인 유류 비용, 서민 식단에 오를 반찬 가격 등 들려오는 소리는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이 불볕더위처럼 쏟아진다. 백성들의 마음을 아는지 하늘도 우울한 것 같다. 물가가 하늘로 치솟는다고 하니 하늘색이 멍든 것 같은 우울한 색이다. 부동산에 영끌이라는 익숙지 못한 단어를 접하고 놀란 적이 있다. '영혼까지 끌어모으다'의 줄인 말을 깨닫고 영혼을 이런 곳에 사용하니 사실 소름이 끼친다. 정치적으로는 색깔론으로 편 가르는 좌우의 진영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지도자들, 그리고 아이들을 그냥 밖으로 내어놓을 수도 없는 위험과 인터넷의 횡포, 개인정보 노출 등 불신과 불안의 홍수 속에서 삶이 고단함은 모두의 마음이라 생각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의해 멸망함으로 나라와 공동체와 가정도 무너진 가운데 70년의 기간이 지나가고 있었고 해방과 자유는 생각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이‘네 백성을 위로하라’라는 메시지이다. 위로의 대상이‘네 백성’이었다. ‘위로’는 히브리어로 ‘나함(nah.am)’인데 ‘다시 숨 쉬게 한다’라는 뜻이다. 숨이 막히고 기가 막힌 절망의 상황에 빠진 사람이 다시 숨을 내쉬고 소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위로이다. 숨이 막히고 기가 막힌 절망에 빠진 자들을 다시 살리실 수 있기에 성서는 이렇게 증언한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3-4).
현대인은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힘들고 지쳐 피폐하게 살아가고 있다. 사람의 위로가 아닌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살아가야 한다. 나의 작은 위로가 저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행복을 찾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위로가 필요한 요즘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를 묵상해 본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삶에 지치고 힘겨워하는 모두에게 참된 위로로서 평안을 얻게 되기를 진솔한 마음으로 간구해 본다. (2022.08.22./2022.08.29.거제신문)
세상 살기 힘들어졌다고 모두 아우성친다. 물가가 오르면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는 월급만 빼고 다 올랐다는 소리가 공공연히 들려오고 있다. 서민 체감경기가 악화하여 저소득층이 느끼는 물가상승률이 더욱 높게 나오게 된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이제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는 이때 큰 복병을 만나게 되었다. 세계적 팬데믹 이후 급변하는 세계 정치와 경제 흐름이 에너지 패권으로 세계 경제 방정식이 더욱 복잡해졌을 뿐 아니라 여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계속되는 전쟁에서 파급되는 경제적인 충격 여파가 우리의 안방까지 밀려오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모두가 낙심하며 캄캄한 듯 세상이 보이지만 이럴 때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다. ‘기대 수준을 높이라’는 것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열정 속에서 매일 아침을 맞으라고 전하고 싶다. 우리의 인생은 꿈도 소중하지만 ‘기대’를 따라간다. 긍정적 생각을 품은 인생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인생은 꼬이게 마련이다. 패배와 실패를 바라보면 잠재의식은 우리를 그쪽으로 몰아가게 되고 평범한 수준 이상의 어떤 시도도 못 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비전을 확장하려면 기대 수준을 높여야 한다. 삶의 변화는 바로 생각의 변화에서 출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거나 가까이는 인생의 과정을 살펴보면 굴곡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연의 이치에도 이러한 굴곡을 벗어날 수 없다.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 나이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느 해에는 가뭄이 있었고 어느 해에는 홍수가 잦았고 어떤 때에는 벼락을 맞았고 토양과 기후 등 계절의 변화에 따라 흔적이 남게 된다. 결국은 수많은 압력과 연단으로 그 나무는 웅장함과 풍성함의 위엄으로 자태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부서진 것들을 사용하신다.'라는 히브리 격언이 있다. 단단한 곡식이 부서져야 빵이 되고, 포도주도, 향수도 부서짐을 통하여 만들어진다. 단단하고 질긴 음식도 우리의 입안에서 고르고 잘게 부서져야 소화되어 영양분이 된다. 사람도 원숙한 인격과 신앙을 갖추려면 반드시 부서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부서짐을 통하여 성숙을 이루어 내기 때문이다.
북극해 근해에는 거대한 빙산들이나 작은 얼음 조각들이 바다 위로 떠서 흘러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거대한 빙산이나 얼음 조각들이 흘러가는 모습을 관찰해보면 놀라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빙산이 흘러가는 방향과 작은 얼음 조각들이 흘러가는 방향이 서로 반대 방향이거나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같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빙산과 얼음 조각인데 흘러가는 방향이 다른 현상은 빙산을 움직이는 힘과 얼음 조각을 움직이는 힘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빙산은 보통 수면 위로 드러난 크기보다 7~8배 정도 더 큰 부분이 물속에 잠겨 있어서 물속에 잠겨 있는 부분을 움직이는 것은 바닷속에서 흐르는 조류의 영향을 받지만, 물 위에 떠다니는 작은 얼음 조각은 조류와 상관없이 물 표면에 있는 바람과 물결 등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힘에 지배를 받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향이나 인생의 가치가 달라질 수도 있다. 세상 풍조에 따라 살아가는 작은 얼음 조각 같은 삶이 있고, 깊은 바다의 조류와 같이 산 물고기처럼 세상을 거슬려 살아가야 함을 깨우쳐 주는 자연의 교과서이다.
모두 먹고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소리에 낙심과 좌절보다도 지금까지 고난의 역경을 헤쳐나왔던 소중한 일들이 자산이 되어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기대 수준을 높이는 자세가 절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역전의 승리를 위한 또 하나의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명품[名品]이란‘뛰어나거나 이름이 난 물건이나 작품’을 말한다. 명품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의 시간과 노력, 기술과 비법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명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신뢰한다. 그러므로 명품을 소유하기 전에 사람이 명품이 되어야 하며, 나 자신의 가치를 명품으로 만드는 인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22.06.30./2022.07.04.거제신문)
관계(關係)라는 단어의 기본의미는‘둘 또는 여러 대상이 서로 연결되어 얽혀 있음’을 말한다. 형제 관계, 친구 관계, 사제 관계 등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사람들 사이의 연결성 그리고 여러 대상이 서로 연결되는 구체적인 양상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관계’라는 말이 일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나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하나의 처세술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관계의 본래 뜻과 지금 쓰이고 있는 뜻은 시대가 급속히 변함에 따라 그 차이가 참으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여러 가지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일이 사회생활이라면,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저 사람은 나와 다른 게 아니라 다만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관계에서 더욱 자유로워진다. 한 하늘 아래 함께 숨 쉬고 있는 걸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 때 나도 너도 사회구성원도 모두 힘들어진다. 이를테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 남의 아픔에 무관심한 개인주의자나 단체, 말만 앞서는 사람, 인간미가 없는 실리주의자,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우기는 사람들을 열거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살펴보면 모두가 또 다른 내 모습이며 숨겨진 열등감의 표현이 아닌가? 그래서 내 생각과 내 철학이 다른 이와 다르지만, 그는 나와 다를 뿐이라는 사고의 수용성이 있을 때 아름다운 관계를 열어 갈 수 있다.
우리나라 정치는 늘 실망의 연속이다. 그래서 백성들의 신음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좌파, 우파, 성별, 세대 간, 지역별 등 이전에 생각할 수 없었던 여러 각도에서 편을 갈라 분열시키고 국민을 갈라치기로 대립시키는 모습이 뚜렷해졌다. 여야의 관점이 다를 수는 있지만 다툼이 있어도 나라를 이롭게, 다툼이 있어도 백성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기본이며 나라를 살리는 것인데 안타까울 뿐이다.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의 정파 간 대립으로 나라가 쇠퇴해 가는 이전의 역사를 또 되풀이 해야만 되는가? 정책과 대화는 실종되고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움의 모습은 가장 변화되고 개혁되어야 할 우리의 정치 현실이다. 관과 관을 서로 연결해주는 것을 가리켜 관계(關係)라고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주는 그것이 관계이다. 생각해 보면 국민 관계의 파괴를 불러왔음이 참으로 아프다. 신음하는 백성과의 관계를 어찌하려는가?
행복은 관계에 있다고 했다. 벌은 꽃에서 꿀을 따지만, 꽃에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오히려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꽃을 도와준다. 사람들도 남으로부터 자기가 필요한 것을 취하면서 상처를 남기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것만 취하기 급급하여 남에게 상처를 내면 그 상처가 썩어 결국 내가 취할 근원조차 잃어버리고 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꽃과 벌 같은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엔 삶의 향기가 가득하지 않을까? 이것이 아름다운 관계이다.
어느 좋은 글을 보니까 평범한 말이지만 새삼 느끼게 하는 글이다. ‘세상 속에 살다 보면 정감이 가는 사람이 있고, 정감이 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 정감이 가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다. 거짓 된 사람 남을 속이는 사람, 좋은 인간관계가 될 수 없다.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진실해야 사람이 붙는다. 남을 속이는 사람, 시간이 흐를수록 드러나게 된다. 이런 사람에게는 거리감이 생기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 즉 인간관계는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 이후 우리는 정치로 말미암아 분열과 상처로 남은 마음들이 치유되어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진실하고 아름다운 관계가 회복되어 급변하는 세계 속에 도약의 기회가 오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
끝으로 관계라는 측면에서 쉬운 성서를 보면, 잠언 11장 11절에‘정직한 자의 축복을 통해 마을 전체가 자랑스럽게 되지만, 악인의 입은 그 마을을 망하게 한다’라고 했다. 둘 또는 여러 대상이 서로 연결되어 얽혀 있는 관계가 형통하면 축복을 통해 전체가 자랑스럽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2022.03.09./2022.03.14.거제신문)
시간이 바뀌어 2023년이라는 새해를 맞았지만, 환경이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나 새해 깨끗한 도화지를 또 주셨으니 묵은 날의 실패를 뒤로하고 모든 일이 잘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새날을 맞았다. 새날의 문턱에서 이어령의 소원시를 몇 번 읽으며 가슴 뭉클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이때 많은 사람이 소원시를 함께 읽고 다시 도약할 수 있는 희망을 품게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었다.
“벼랑 끝에서 새해를 맞습니다. 덕담 대신 날개를 주소서. 어떻게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까. 남들이 앉아 있을 때 걷고 그들이 걸으면 우리는 뛰었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눈앞인데 그냥 추락할 수는 없습니다. 싸움밖에 모르는 정치인들에게는 비둘기(평화)의 날개를 주시고 살기에 지친 서민에게는 독수리의 날개를 주십시오. 주눅 들린 기업인들에게는 갈매기의 비행을 가르쳐주시고 진흙 바닥의 지식인들에게는 구름보다 높이 나는 종달새의 날개를 보여 주소서. 홀로 사는 노인에게는 학과 같은 날개를 주소서. 그리고 남남처럼 되어 가는 가족에는 원앙새의 깃털을 내려 주소서. 이 사회가 갈등으로 이제는 찢기기 전에 기러기처럼 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소리를 내어 서로 격려하고 선두의 자리를 바꾸어 가며 대열을 이끌어 간다는 저 신비한 기러기처럼 우리 모두를 날게 하소서”
간절히 소원하는 이 내용이 어쩌면 소리 없는 백성들의 심정도 똑같은 마음이 아닐까?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동일시되는 마음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다 이 대목에서 온몸으로 전율을 느낀다.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은빛 날개를 펴고 새해의 눈부신 하늘로 일제히 날아오르는 경쾌한 비상의 시작! 벼랑 끝에서 날게 하소서”
그렇다. 생각해보면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 누에고치에서 나방이 나올 때 쉽게 나오도록 칼로 누에고치를 찢어주면 나방은 쉽게 나오지만 날지 못하고 얼마 있지 않아 죽어버린다. 스스로 죽을힘을 다해 누에고치를 뚫고 나와야 그때 강화된 날개로 하늘을 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문제라는 누에고치, 질병이라는 누에고치, 고난이라고 하는 누에고치 속에 갇혀 있을 때 필사적으로 날갯짓을 해야 할 것이다. 둥지를 떠난 어린 새들이나, 고치를 빠져나온 나방들은 필사적으로 날갯짓한다. 그들의 날갯짓은 장난이나 놀이가 아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무기력증에 빠져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둥지에서 무슨 날갯짓 하겠는가? 등 따습고 배부른데 어떻게 죽을힘을 다해 날갯짓하겠는가? 가만히 있는 것이 대책이 아니다. 필사적인 날갯짓이 약이며 답이다. 자력으로 죽을힘을 다해 몸부림, 발버둥, 필사의 날갯짓해서 창공을 뚫고 올라 나르라는 뜻이다.
이미 지난해야 어찌 되었든 지금 시작되는 새날들은 얼룩지지 않았으니 이번만은 멋진 걸작을 그려보자. 나 또한 희망의 마음을 품고 소원시에 응답하는 기도를 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당신의 사랑의 눈을 주셔서 역사와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게 하시고 신뢰와 소망으로 보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로운 귀를 주셔서 이웃의 아픔의 소리를 듣게 하시고 고통의 신음을 듣게 하소서. 그리고 희망을 속삭이며 사랑을 전하게 하소서. 이제 미지의 날들을 향해 출발합니다. 폭풍의 밤에도 한 가닥 빛을 던져 주실 것을 믿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그것을 이길 만한 힘을 주실 것을 확신하오며 담대하게 출발하겠나이다’
날갯짓은 낭떠러지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금 도전하는 실력의 날갯짓만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낼 수 있는 자원이 된다. 올해 한 해를 살아가면서 어려울 때 위로가 되고 서로서로 힘이 되어 빛나는 세상이 펼쳐지기를 소원해 본다.(2022.01.26./2022.02.08.거제신문)
지금 우리가 살고 이는 이 시대를 가리켜 불확실성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감사 부재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각박 서럽다는 느낌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국어사전에 보면‘각박스럽다’를 형용사로‘인심이 몹시 모질거나 야박한 데가 있다’라고 표현한다. 이를테면 감사보다는 원망과 짜증이 많으며, 가정들을 돌아보아도 원망과 불평이 많은 것이다. 또한 현실을 살펴보아도 원망과 불평이 많은 것을 피부로 느낀다. 이러한 감사 부재가 우리들의 마음과 가정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우리는 태산을 넘어 힘 곡에 이르는 듯한 이 어려운 터널을 지나면서도 추수 감사의 절기를 맞이했다는 것이 참 다행이며 감사를 회복하는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1620년 9월 영국에서 신앙의 박해를 받던 청교도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2개월이 넘는 고난의 항해 끝에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첫해 겨울, 굶주림과 추위, 인디언 습격에 대한 공포 속에 보내면서 반수가 병에 걸려 죽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믿음으로 정착을 시작하였고 인디언들과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고 옥수수와 밀, 경작의 도움을 받고 그 해 풍성한 추수를 하였다. 53명의 청교도는 인디언들과 더불어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하였다. 넉넉한 조건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관하심 대한 감사가 바로 최초의 추수감사절이다. 삶의 조건은 처참했지만, 그들에게 나타난 행동은 감사였다.
감사(thank)의 어원은 생각(think)이다. 감사하려면 생각해야 한다.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생각하면 감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감사는 얕은 생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화이다. 신학자 몬테 피오레는 “생각하고 감사하라(Think and Thank)”고 했다.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라고 한다. 현대인들은 감사에 대해 여러 태도를 보인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가 하면, 은혜를 받고도 더 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기도 한다. 또한 받은 은혜를 잊고 살아간다.
가족들이 저녁을 하게 되었다. 어린 아들이 유치원에서 배웠는지“감사히 먹겠습니다”라며 수저를 들었다. 어찌나 모습이 예쁘던지 부모는 말하기를“우리 식구들은 앞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고 밥을 먹기로 하자” 그러던 어느 날 식탁에 반찬이 두 가지만 올라왔다. 식구들 앞에서 불평도 하지 못하겠고 그래도 감사 인사는 해야 하는데 자신도 모르게“간신히 먹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간신히라도 감사해야 하는 모습은 아름답게 여겨진다.
근래 긍정 심리학 연구가 발전하면서 서양 심리학자들 사이에 인간의 행복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사람의 심리적인 이상 반응이나 병과 같은 문제를 주로 연구했던 과거에 반해, 지금은 무엇이 행복하게 하는지를 연구 주제로 삼는 것이다. 켄터키주립대의 네이선 디월 교수는 감사하는 마음을 연습하면 똑같은 스트레스가 찾아와도 감사하다는 마음을 연습하지 않는 사람에 비해 그 영향을 상당히 적게 받는다고 연구 발표를 했다. 곧 감사하는 마음은 외부의 스트레스로부터 보호막을 형성하는 것이 쉽게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심리적 저항력을 길러준다는 것이다.
필자는 항상 생각하기를 우리 민족은 좀 특별한 곳이 있다고 생각한다. 힘들고 어려움이 있다 해도 소망을 보는 민족이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갈지라도 하나님께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 것을 내다 보며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삶에 대한 감사’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나로 하여금 험악한 가운데서 보호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험악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기도하게 하소서. 나의 괴로움이 그치게 해달라고 빌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것을 정복하도록 기도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감사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감사의 분량이 행복의 분량이며, 감사한 만큼 행복해진다. 감사한 만큼 강건하며, 감사한 만큼 능률이 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는 말이 있다. 불행한 사람이라도 감사하면 행복한 사람이 되고 행복한 사람이라도 불평하면 불행한 사람이 된다. 감사하면 내가 행복해진다는 공식이다. 이 공식이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용되기를 응원해 본다.(2021.11.30./2021.12.06.거제신문)
현재 우리 사회에서 자주 회자하는 말이 있다. ‘내로남불’이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뜻은 대략 짐작하면서‘사자성어’로 알고 있다. ‘내로남불’의 뜻은‘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긴 문장을 축약해서 줄임말로 말의 앞말만 따서 만들어진 신조어라 할 수 있다. 굳이 뜻풀이라고 말하기는 어색하지만 말 그대로‘내가 하면 사랑이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로 남을 비난하면서도 자신에게는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뜻하는‘이중잣대’에 관한 표현이다. 이를테면‘내가 하면 예술이고 남이 하면 외설’,‘내가 하면 오락이고 남이 하면 도박’이라는 것이다. 똑같은 또는 유사한 상황에서 각자의 관점만을 주장한다. 한마디로 말해서‘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뜻’이다. 심리적 측면으로도 내가 하면 잘한 것이고 남이 하면 못마땅한 인간 본연의 심성이라든지 마음의 문제도 여기에 포함되어 교만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내로남불의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우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내면을 들여다보면 약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신이 강한 존재라는 것을 어떻게든 증명하고 또한 절대로 약한 존재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보니 어느덧 우리 자신에게 겸손이라는 귀한 결정체가 사라지고 욕망과 폭력적인 방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신이나 집단이 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존재 자체가 무너진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약함을 부정하고 무수한 언어적 수사를 동원하여 복잡하게 만든다. 이러한 것이 약하다는 방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저 사람은 나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관계에서 더욱 자유로워진다. 한 하늘 아래 함께 숨 쉬고 있는 걸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내로남불을 목놓아 외치게 된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 남의 아픔에 무관심한 사람,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우기는 사람, 모두가 또 다른 내 모습이고 숨겨진 열등감의 표현인 걸 알아야 한다. 이런 말이 있다. ‘어느 때인가 내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을 때,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 길가에 피어 있는 작은 꽃, 작은 돌 하나까지도 내게는 다 삶의 의미가 되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의미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이 모두는 삶의 이유이다. 소중한 이웃이 있기에 함께 울고 웃고, 괴로워할 수 있기에 인생은 의미가 있으며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것이다.
인간은 다 약하다. 이 약함을 유한성이라고도 말한다. 성서에서는 종종 인생을 토기 그릇, 질그릇에 비유한다. 질그릇의 특색은 모양이 투박하고 작은 충격에도 잘 부서진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든 것이어서 별로 가치가 없다. 질그릇은 진흙을 빚어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운 용기(容器)이다. 윤기가 없고 투박하고 무른 것이 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연약하고 무가치한 존재나 한계가 분명한 인간의 육신임을 말한다. 인간은 강한 것 같으나 사실 견고하지도 못한 참으로 연약한 질그릇 같은 존재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다 마음의 문을 열고 마음의 숨결을 들어보면 절망의 몸부림이 있고 가슴마다 탄식이 서려 있다. 인간은 상한 갈대,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존재요, 들의 꽃과 같은 존재라고 표현한다. 끊임없이 질병과 환난, 시험과 가난, 실패와 공포로부터 쉽게 낙망하고 좌절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은 갈대다. 한 방울의 물, 한 점의 바람에도 죽을 수 있다"라고 했다. 이처럼 인생은 깨지기 쉽고, 투박하여 질그릇과 인생은 많이 닮았다.
우리는 이 질그릇에서 느낄 수 있는 진리가 있다. 사람들의 살림살이 중에 소소하기도 하지만 친근한 그릇이다. 물론 질그릇은 깨어지기 쉬우므로 항상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질그릇이 가진 본질적인 가치는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간장이 담기면 간장 그릇이며, 보석이 담겨있으면 보석 그릇이다.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그릇의 가치는 달라진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고후 4:7). 연약한 질그릇일지라도 그릇 안에 담긴 내용물로써 평가하듯 우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오늘 내용물을 챙겨보자. (2021.10.19./2021.10.25.거제신문)
초록빛이 반짝이는 나무이파리들이 계절 여행을 준비하듯 가을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오곡이 무르익어 열매를 맺는 계절, 봄부터 수고한 농부의 가슴에 기쁨을 안겨주는 가을을 기다린다. 그러나 가을을 기다린 절박한 이유가 있다. 가을에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듯 바람이 불 때마다 흩날리는 낙엽의 운치나 가을 햇살을 담뿍 머금은 먹거리의 깊음과 성숙을 맛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고 싶기에 기다렸다. 된더위가 쏟아지는 여름 가운데 잠을 이루지 못한 불면의 여러 날을 밤새도록 몸으로 받아내었던 고통이 있었기에 시원한 계절이 오면 지친 나를 위로해 줄 것 같은 바람으로 가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기다림은 기다릴 수밖에 없을 때 존재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내 힘과 능력 그리고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그저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둘 수밖에 없을 때가 바로 기다림의 순간이다. 지금처럼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사람은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특히 생활고와 직접 연결된 많은 소상공인과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그 결과 성급하게 행동하기도 하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게 된다. 혹은 자기 자신과 생활 주변에 부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채우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기다림만도 힘든데 또 다른 문제의 씨앗이 심어지게 된다. 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삶 중의 하나는 기다림이다. 신앙인의 삶은 다시 오실 예수님의 큰 위로를 받을 날을 기다리며 사는 삶이다. 그 기다림은 전혀 헛되지 않은 것을 믿고 있다. 때로 고난도 당하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숙을 위한 진통이며, 때로 병도 들지만, 그것도 더 깊은 영성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기에 끈질기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며 늦어져도 실망하거나 나태해지지 않는 삶이다.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조급병이다. 사람들은 서서히 성장하는 것보다 급성장을 좋아한다. 그러나 결코 한순간에 이룰 수 없는 것이 있다. 밀가루 반죽을 해서 바로 빵을 만들면 부드럽지 않고 딱딱해서 못 먹으며 밭에서 방금 캔 감자는 바로 먹기에는 너무 독하며 포도도, 빵도, 감자도 하루 정도 숙성을 시켜야 제맛이 나는 것처럼 결정도 하루 정도 가라앉혀야 본래의 정체가 드러난다.
성서를 보면 하나님은 귀히 쓰시길 원하는 사람마다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여 철저하게 훈련하셨다. 요셉을 정금 같이 쓰시기 위해 13년 동안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경험하게 했고, 모세를 훈련하기 위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했으며, 여호수아를 쓰시기 위해 모세의 시종으로 40년을 기다리게 했다. 귀하게 쓰시기로 작정할수록 많은 준비를 시키셨다.
어떤 버섯은 6시간이면 자라고 호박은 6개월이면 자라지만 참나무는 6년이 걸리고 건실한 참나무로 자태를 드러내려면 100년이 걸린다. 설렁탕에 사용할 진국을 우려내기 위하여 8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 우리의 거품과 세속적인 기름기는 기다림으로만 진국 되어질 수 있다. 태아는 세상의 빛을 보기 위해 10달을 엄마 뱃속에서 기다린다. 학생은 대학입시를 위해 공부하면서 12년을 기다리고, 군에서 제대날짜를 기다리는 군인, 해외에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 4년을 기다리는 운동선수. 분단된 우리에게는 통일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모두 저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무엇인가를 기다림이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 기다림 속에서 <삶>은 진행되고, 기다림 속에서 인도되고, 기다림 속에서 성취되어 감을 보게 된다.
기다릴 수 있음을 신앙적 표현한다면 영력이라 할 수 있지만, 보편적 표현은 인내의 실력이라 할 수 있다. 기다리는 자체가 이미 절반은 승리한 것이다. 기다림의 뿌리는 신뢰이다. 조바심을 몰아내고 기다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줄 수 있다면 웃을 날이 분명 올 것이다.(2021.09.08./2021.09.14.거제신문)
델타 변이바이러스의 급격한 확산과 더불어 전 세계적 코로나 4차 대유행이 본격화되어 가는 양상이다. 각국 상황을 보면 신규 확진자 수가 나아지기보다는 악화할 것으로 예견된다. 문제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심리적인 공포와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데 있다. 백신을 접종하고 좀 더 좋은 환경을 기대했는데 기대와는 달리 역방향으로 삶의 질이 계속 떨어지는 것에 실망하고 있다. 심리적 구속은 똑같은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답답함과 불안, 우울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의 생각에서 두려움을 떨쳐 버리는 강한 정신력이 필요한 때이다.
심리학 교수 앨런 다운스(Alan Downs)는 ‘리더여, 두려움을 극복하라(The Fearless Executive)’라는 저서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성공의 핵심은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당신을 지배하는 7가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라”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일곱 가지 두려움은 무능, 거부, 결핍, 현실, 미지, 권위, 나이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사람을 병들게 하는 독이 들어 있다. 행복을 빼앗아가고 인생을 실패하게 만드는 적이라 규정한다. 두려움이라는 씨앗이 마음에 뿌려지면 다양한 방법으로 열매를 맺어 우리를 괴롭히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요즘 이 말씀이 심리적 백신이라고 생각되어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1:7) 라고 말씀한다. ‘두려워하는 마음’은‘소심함'(timidity) 비겁함(cowardice)’을 뜻하기도 한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작은 문제 앞에서도 벌벌 떨면서 소심하고 비겁한 태도를 보이는데 이런 마음은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의 헛된 소리가 가져다주는 마음은 두려운 마음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담대한 마음이기에 어떤 문제이든 두려워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오히려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가질 때,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게 되는 말씀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생활 전반에 걸쳐 얼마나 메마르고 건조한가? 사랑할 여유가 없어 사랑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미움이 지배하고 두려움이 우리를 짓눌러 활동에 어려움을 줄 뿐만 아니라 언제든 내 마음에서 폭발할 것 같은 위기의 순간들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 시대의 아픔을 모두 알고 있는 우리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든 이웃을 사랑할 때 두려움이 사라진다. 함께하기 때문에 우리의 내면에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크리스천들은 편지 마지막에 ‘On the victory side’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승리 편에서 있는’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청교도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장군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그는 전쟁이 벌어졌을 때, 상황이 불확실한데도 승리를 확신했다. 그래서 편지 마지막에 항상‘승리 편에 서 있는 올리버 크롬웰’이라고 썼다. 모든 공문서에도, 개인 편지에도 이 표현을 썼다. 크롬웰 장군에게서 내려오는 공문서를 읽을 때마다 참모들과 스텝들은 그가 승리를 확신하고 있음을 느꼈고 승리에 대한 확신이 부대에 확산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승리의 확신을 가진 후부터 전세는 바뀌게 되었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크롬웰과 부하들은 자신을 다스리는 절제의 마음으로 패배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치게 되었다.
절제하는 마음은‘자기 통제, 자기 조절(self-control)’을 의미한다. 근신하고 신중해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속에 두려움이 가득 차면 절제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두려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과식, 과음에 빠지고 도박과 향락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위기의 상황을 맞을 때마다 절제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마음을 통제하고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3장 23절). 마음을 지킨다는 말은 걱정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어서 심리적 백신이다.(2021.07.21./2021.07.26.거제신문)
백신 주사 맞으셨어요?’ 요즘 내게 들려오는 인사말이다. 얼마 전까지의 인사는‘바이러스 조심하세요’‘다수의 사람이 있는 곳은 가지 마세요’ 이런 걱정스러운 인사말이 주류를 이루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코로나19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우리 인류의 역사는 기원전을 뜻하는 BC와 기원후를 뜻하는 AD는 그 의미가 무엇이든 지금은 너무나 널리 쓰이고 있어서 대부분 사람이 그 개념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코로나19의 기점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고 할 정도로 코로나 전과 코로나 이후 삶의 역사를 나누고 있다. 질병이 바꾼 세계 역사의 변곡점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점차 확진자가 줄어드는 반면, 서아시아 인도, 동남아시아 일부 국가. 남미 등은 확진자와 사망자가 계속 속출되는 충격이 진행 중이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과 함께 공포도 전 세계로 확산하여 각국이 공항을 막고 도시를 폐쇄하며 이동을 금지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확산을 막고 있지만, 정작 심리적인 공포는 국경을 넘어 세계 모든 사람에게 감염되었다. 이른바 팬더믹이 불러온 공포이다. 이로 인해 세계적으로 외출 자제와 심리 위축으로 소비가 급격히 줄고 있고, 구멍가게부터 대기업까지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주 뉴스로 소식을 접하지만 작은 자영업인 동네 음식점, 학원, 헬스클럽 등은 소득이 크게 줄면서 종업원들을 내보내고 힘겹게 버티거나, 폐업하는 곳도 속출하고 있다. 정부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펴고 있지만 이러한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어 걱정이며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통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실물경제의 위기는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 어려운 시기를 함께 보내고 있는 이들을 위해 매일매일 코로나 사태 진정과 코로나로 인해 피해당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코로나 검사를 두 차례 시행한 적이 있다. 이 또한 약간의 진통을 경험하지만, 결과를 기다리기까지 마음 졸이는 것도 힘든 일이다. 감사하게도 내 목숨이 위험에 처하거나 코로나에 감염되었던 적은 없지만, 코로나19는 내 삶에도 개인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가 뺏어간 일상을 빨리 되찾고 싶은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을 알기에 백신 예방접종은 국민적 인사로 등극하였다.
너도나도 말하는 백신이란 무엇이며 왜 반가운가? 태풍과 비바람이 거셀수록 미세먼지와 오염이 사라지듯이 이제 마스크를 벗고 다가올 파란 하늘을 보면서 지금의 위기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 여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들은 바에 의하면, 바이러스나 세균의 면역에 가장 중요한 단백질을 만드는 DNA(유전자)를 백신으로 만든 것이 DNA 백신이라고 한다. 이러한 백신을 접종하게 되면 몸에 들어가 해당 항원을 만들게 되고 그 항원은 면역세포들에 의해 항체를 형성하게 유도하게 된다. 그러면 해당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이 형성되어서 감염을 예방하게 된다. 백신은 원인균을 적당한 온도로 가열하거나, 특정의 약품을 첨가하여 원인균을 화학적으로 변화시켜 감염예방 및 치료제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백신의 원리에서 찾을 수 있듯이 힘겹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마음과 육신의 상처를 모두가 함께하려는 의지적 사랑으로 가열시키고 그것에 믿음의 인내를 더 한다면, 오히려 우리의 상처는 치료하는 백신으로, 희망의 꽃으로 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모든 역경 속에는 기회가 있다.’ 했다. 성서에는『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라고 하였다. 우리의 눈물이, 우리의 깊은 상처가 치유되어 가정과 사회를 살리는 생명의 꽃으로 피어나길 갈망하며 기도해 본다.(2021.06.03./2021.06.07.거제신문)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였다. "날씨가 추운데 꽃은 피더라". 우리는 춥다고 아직 움츠리고 있는데 꽃은 피어나고 있다. 움츠리고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의 행위이고 꽃을 피우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우리는 지난겨울 추위와 함께 코로나19로 인하여 모든 면에 힘들게 살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4월의 봄을 몹시 기다렸다. 겨우내 간직하였던 꿈들이 피어나듯 수선화는 이미 피어서 오래도록 그 노란 꿈을 펼치고 있다. 하얀 꿈의 목련은 만발하여 봄에 풍성함을 보여준다. 개나리도 노란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내밀고 진달래도 이산 저산에 피어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하는 말이“세상이 환해졌다. 정말 좋은 날씨다. 볼 것이 많아졌다”라고 한다. 그동안 어디 있다가 이렇게 나타났을까? 온 세상의 나무들이 움을 트이고 가지마다 색깔로 꽃을 피우는 저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어떻게 해서 칙칙하던 겨울이 이렇게 환한 세상으로 바뀌어 갈까? 겨울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가졌던 모든 열매를 다 떨어뜨리고 자신들이 입고 있던 모든 이파리를 다 떨어트리고 죽었기에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들이 성취한 그 어떤 것도 가지지 않는다. 열매도 잎도 다 버렸다.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잎이 그렇게 푸르르게 덮여 있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그것들을 여름에 아니면 가을에 다 날려버린다. 사람의 손길이 닿아 강제로 그랬던지, 아니면 스스로 그랬던지 그들을 다 버렸기에 이 봄을 맞이할 수 있다. 마치 예수 부활의 모습을 자연 세계가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때 찾아오는 하늘과 땅의 은총,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라는 그 일체 좋음의 세계 안에 그분의 뜻을 헤아려 본다.
그러나 정작 봄은 왔는데 우리는 아직 겨울에 머물러 있다. 세월의 풍파를 겪고 사셨던 부모님과 같은 어르신들과 장터의 이웃 어른들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상황이다. 행여나 기대하지만, 오늘도 변함없이 답답한 마스크로 얼굴 부분을 가리고 엘리베이터 속 밀폐된 공간 속에서 혹여 감염될까 싶어 마스크를 다시 고쳐 써보는 모습에서 봄은 아직 멀리 있는 마음의 세계이다. 4월의 봄기운을 느끼며 마스크를 던져 버리고 긴 숨을 쉬어야 할 때, 유아들에게까지 마스크를 씌우는 우리의 손이 왠지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 없다.
그렇지만 봄은 우리에게 다가왔다. 봄의 속성을 생각해 본다. 동트기 전 새벽이 더 깊듯이 봄이 오기 전 겨울이 있었음을 자연은 우리를 깨우친다. 토머스 칼라일이“역경을 견뎌 내는 사람이 백 명이라면 번영을 견뎌내는 사람은 한 명에 불과하다”라고 했던 말처럼 지난날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풍요로움을 누렸던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시대를 살아가면서 아직도 적응하기 힘든 모습이 일상이다. 평안함을 불안함으로 하는 주범이 계절이 바뀌어도 쓴 뿌리처럼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그런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환경을 바꾸려 하지 말고 차라리 나를 바꾸면 어떨까? 내 사고방식을 바꾸고, 내 자세를 바꾸고, 내 삶의 방식을 바꾸는 편이 내게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인간의 불행과 행복의 차이는, 생각과 기준의 뿌리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실제로 행복하여지려면, 우리의 생각과 세상의 기준들을 전환 시켜야만 한다.
심리학자 사무엘 스미스는 말하기를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성품이 바뀌고 성품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라고 했다. 큰 배를 움직이는 것은 선장이 붙잡고 있는 키이듯이, 우리의 삶도 생각에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물은 흐르지 않으면 웅덩이가 되고, 생각은 흐르지 않으면 고민이 되고, 피는 흐르지 않으면 고름이 되듯, 우리의 생각이 흐르지 않으면 응어리가 되어 봄이 오고 꽃은 피어도 우리는 겨울을 사는 것 같다. 그러므로 ‘봄이 되려면 내가 먼저 봄이 되어야!’ 하고 봄이 오는 소리를 희망으로 나누어 주어야 한다. (2021.04.05./2021.04.12.거제신문)
어느 목사님의 글이라고 지인이 소개했다. “하나님! 우리가 얼마나 서로 거짓과 막말 들을 했으면 입을 마스크로 다 틀어막고 살게 하십니까. 하나님! 우리가 얼마나 서로 다투고 싸우며 시기하고 사랑을 안 했으면 서로를 다 거리 두어 살라 하십니까? 하나님! 우리가 얼마나 죄를 짓고 손으로 나쁜 짓을 했으면 어디 가나 소독제와 물로 다 씻게 하십니까? 하나님! 우리가 이웃 간의 사랑이 얼마나 없었으면 주먹으로 인사하게 하십니까 ….”
지금 코로나 감염증 예방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표현하는 간절한 마음과 동시에 한편으론 풍자적이기도 한 아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건강과 생활 전 영역에서 미치는 내면의 두려움과 사람들의 외적 생활방식을 통째로 바뀌게 되는 충격의 반응이라 볼 수 있다. 대부분 사람은 예방을 위해 몇 가지 행동을 하게 된다. 손을 깨끗이 씻고, 소독제 철저히 사용하며, 밖에 안 나가기, 최소한 나가기, 나가도 가능하면 사람 안 만나기 등이다. 최신 보고에 따르면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생과 치사율은 전 세계적으로 불안감을 높여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한다. 불안장애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출현하기 전부터 이미 전 세계적으로 가장 흔한 정신건강 질환 중 하나로 자리를 잡고 있다. 물론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적절한 수면, 고른 영양 섭취, 규칙적인 운동이 도움이 되며 취미생활이나 음악감상 등 적절한 휴식을 통하여 몸과 마음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
파스칼은 그의 작품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는데 그 말의 뜻은 사람은 자연 중에서 가장 약하여 마치 갈대와도 같으나 사고하고 생각하는 점이 존귀하고 위대하다는 의미이다. 현 세기의 위대한 심리학적 발견 중 하나는 사람의 생각이 행동을 조절한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했고 또한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라고 했다. 이는 자기 생각, 마음을 잘 지키며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느 용사보다 더 위대하다고 전한다.
생각은 감정에 영향을 주고 기분을 결정한다. 내 기분이 우울하게 되었다면 이것은 일, 가정, 또는 그 외의 것에 대해 우울한 생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매번 감정을 조절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생각할지는 선택할 수 있으며 이것은 우리의 마음 곧 정신상태를 변화시킬 것이다. 누구나 인생은 어떤 면으로든 난관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살다 보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처럼 외부 상황이 우리를 쓰러뜨릴 때 승리의 삶을 사는 비결은 내부, 즉 마음에서부터 일어서는 것이다. 외부의 압력이 아무리 거세어도 낙심과 좌절을 쫓아버리고 마음으로 굳게 서야 하는 자세가 필요한 때이다. 깊은 바닷속의 수압은 대단하여 거대한 물체도 찌그러뜨릴 정도이다. 그러나 작은 물고기는 유유히 그 속에서 생존하며 살아간다. 수압이 강한 심해 속에서 작은 물고기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바닷속의 수압보다 물고기 속의 압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하여 불철주야 다가오는 무수한 압력들로부터 우리가 터지고 깨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 속의 내적, 정신적, 마음과 생각의 압력을 올리는 방법이다. 질병의 압력, 물질의 압력, 가시의 압력, 상처의 압력들이 우리를 쉬지 않고 누를 때 우리 속의 내적 압력을 높이면 이겨나갈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세계적인 팬데믹으로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누군가에게 속거나 괴롭힘을 당해서 상실감에 주저앉아 울고만 싶은 그런 경우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다. 보이지 않는 전염병이 우리의 마음을 주눅 들게 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이때 오늘을 온전히 살려면 더 굳은 의지가 필요하다. 세상이 좋아지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내 삶이 좋아져야 하겠고 길이 새롭게 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내 발과 내 발걸음이 새로워진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기에 내적 압력을 높여 나가듯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며 사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2021.02.03./2021.02.08.거제신문)
지금 우리는 기침 소리만 내어도 스스로 당황하고 주변 시선에 눈치를 보는 세상을 살고 있다. 세상은 코로나19로 인하여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삶의 영역 속에 공식이 아닌 파행적인 기준이 되어 엄청난 혼란과 아픔을 가져왔다.
옛날의 정치구호 중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고 했는데 지금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라는 역설적인 구호가 되었으니 이미 우리는 이상한 세상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꼭 만나야 하고 보고 싶은 사람은 천 리의 먼 길을 가서도 만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방식이었다. 이러한 공식이 깨어지다 보니 우리는 모두 아파한다. 그렇게도 우리를 사랑하셨던 부모님이 병원에 입원하여 고통 중에 있을 때도 가족들이 자유롭게 만나지 못한다. 때론 화상전화로 마지막 통화를 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눈물겨운 일에 가끔 가슴이 저려 오기도 한다.
그뿐일까? 현재 우리의 상황은 코로나19로 인해 셧다운과 의료시스템 붕괴, 경기추락과 더불어 자영업자들의 한숨과 실직자 속출 등 힘든 상황 속에 놓여 있다. 바이러스로 인해 정치, 경제, 산업, 교육, 보건, 환경 등 여러 분야에서 적응하지 못한 아우성들이 우리가 지금 어렵고 난해한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이렇게 코로나19 이후에 우리 사회는 원격수업, 화상회의, 재택근무, 배달문화, 이동 제한에 따른 항공 및 관광수요의 감소, 정부의 통제 등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다양한 현상들은 우리 생활 전반에 불편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고통을 안겨다 주기에 즐거운 노랫소리가 사라지고 탄식도 지쳐 앓는 소리만 들려온다. 남녀노소 모두가 힘들고 아프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일상적이지도 않고 기가 막힐 일들의 연속이 우리의 자율적 생활이 아닌 통제의 생활이 우리 자신을 묶어놓은 인생처럼 절망의 한숨을 쉬며 탄식하는 소리가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니 모두 마음이 닫혀 있다. 마치 내일을 향한 비전을 잃어버린 듯 마음에 없는 노래를 악보에 담을 수 없는 형국이 지금 처한 모습이다.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회복을 꿈꾸고 있다. 언제 좋은 날이 올 수 있을까? 언제 경기가 언제 회복이 될까? 언제 마스크를 벗고 시원한 공기 마시며 살까? 이전의 일상생활이 그리워지면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위대한 말씀으로 인내를 하면서 회복을 소망하고 있다. 회복(回復)이란 ‘원래의 좋은 상태로 되돌리거나 원래의 상태를 되찾는다는 것’이다. 세상의 변화는 천천히 올 수 있겠지만 이 어려움을 대처하는 우리의 태도, 자신의 마음가짐, 자신의 방법으로 기다림에 인내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욕심이 많아 무조건 미래의 것만을 추구했다가 지금 돌아보니 지난날의 자연의 혜택과 소박한 인간미 즉 사람들과 만나 웃음을 교환하고 여행의 발걸음과 시장의 활발함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인간관은 곧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지금 셧다운과 단절된 세상에서 우리 인간은 이 회복이 없으면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가 한시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 곧 다시금 살아갈 수 있는 회복이라는 복원력이다.
어느 엄마가 부엌에서 국을 많이 끓여서 옆집으로 가지고 가는 것을 보고, 유치원 다니는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는 왜 옆집에 국을 가지고 가는 거야?" "옆집 아줌마의 엄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가슴에 상처를 입으시고 누워 계셔"라고 대답하고 국을 가져다주고 돌아오니까, 딸아이가 무엇을 찾아서는 밖으로 나갔다. 일회용 반창고를 가지고는 옆집 아줌마에게 간 것이다. "엄마가 그러는데 아줌마 가슴에 상처가 있다면서요. 일회용 반창고를 붙이면 곧 나을 거예요" 이 딸아이가 가져온 반창고는 마음을 치료해 주는 사랑의 반창고였다. 반창고에 연고도 없고 치료될 만한 약제가 포함된 것은 아니지만 요즘 국민은 불안한 마음, 괴로운 마음, 억눌린 마음을 치료하는 마음의 양약과 같은 이 반창고를 가슴에 붙이고 싶다. 반창고는 병균이나 오염물으로부터 딱지와 상처를 보호해 주며 신체의 치료 과정의 방해를 덜 받게 되듯이 조그만 마음과 배려는 힘을 얻을 것이다. (2020.12.10./2020.12.21.거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