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 중에 빠지고,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나의 마음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주는 주님께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에 따라 우리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이 변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요단강물과 같은 예수의 보혈을 통하여서 죄인이 의인이 되고 약한 자가 강한 자가 되고 병든 자가 고침을 얻는 생명의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오늘 말씀은 아람 나라의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람의 군대 총사령관이었는데 대제국이던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구국 공신이었습니다. 나아만 이름의 뜻은 "즐거움"이란 뜻인데 현재의 나아만에게는 병으로 즐거움이 없습니다.
▶언제나 은혜는 단순한 사람이 받습니다. 세상 지식도 많이 가질수록 좋으나 이것이 신앙과 연결되지 않으면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현대의 많은 사람이 "합리적이지 못한 것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은 합리적인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여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사 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였습니다. 마침내 나아만 장군은 그 말씀대로 자기의 생각, 편견, 관념, 모든 것을 다 벗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요단강에 뛰어 들어갔더니 문둥병이 나아 어린아이 살과 같이 깨끗하게 고침. 받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순종이 중요합니다(2024.11.24.주일아침예배).
👉오늘 하루도 살아 있음에 감사
👉오늘 하루도 지켜 주신것 감사
👉오늘 하루도 건강 주신것 감사
👉오늘 하루도 은혜 주신것 감사
👉오늘 하루도 큰복 주신것 감사
👉오늘 하루도 응답 주신것 감사
👉오늘 하루도 양식 주신것 감사
👉오늘 하루도 믿음 주신것 감사
👉오늘 하루도 도와 주신것 감사
👉오늘 하루도 능력 주신것 감사
👉오늘 하루도 채워 주신것 감사
👉오늘 하루도 기쁨 주신것 감사
👉오늘 하루도 연단 하심을 감사
👉오늘 하루도 평안 주심을 감사
👉오늘 하루도 행복 주심을 감사
👉오늘 하루도 좋은것 주심 감사
👉오늘 하루도 손잡아 주심 감사
👉오늘 하루도 인도해 주심 감사
👉오늘 하루도 보호해 주심 감사
👉오늘 하루도 회개케 하심 감사
👉오늘 하루도 승리케 하심 감사
👉오늘 하루도 사랑해 주심 감사
👉오늘 하루도 용서해 주심 감사
👉오늘 하루도 깨닫게 하심 감사
👉오늘 하루도 소망을 주심 감사
(2024.11.17.추수감사주일 오전예배).
▶감사와 불평은 아주 다른 뜻이며 다른 세계입니다. 느낌도 다르고 해석 자체도 극과 극으로 서로가 아주 먼 거리에 있습니다. 뜻을 살펴보면 감사(感謝)의 기본의미는 고마움을 표시하는 인사입니다. 이런 감사는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와 불평은먼 거리에 있는 것 같지만 실제는 아주 가깝습니다. 생각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주어진 상황이 어떨 때는 감사로 나타나고 어떨 때는 불평으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감사와 불평은 서로가 먼 곳에 있지만 아주 밀접하게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불평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민11:4) 탐욕입니다. 탐욕은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탐욕이 있으면 감사는 사라집니다. 욕망은 끝이 없고 그래서 감사보다는 늘 불평 속에 상대적 빈곤과 부족함 속에 사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면 감사가 나옵니다. 욕심은 없는 것에 대하여 계속 미련을 두게 하므로 감사하는 마음에 병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함을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 생활이 때로 광야 길을 걸을 때도 많지 않습니까? 그럴 때도 감사훈련을 해야 합니다. 감사와 불평 사이는 멀지 않습니다. 감사와 불평의 비중이 조금만 치우쳐도 불평과 원망으로 기울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은 중병입니다. 감사의 건강한 체질 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2024.11.10.주일아침예배).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힘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능력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모였고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양을 합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오늘 그 능력이 감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 없던 능력이 오늘 갑자기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이나 주님의 사랑이나 주님의 은혜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해보면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였고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기도하니까 사람의 병도 고치고 능력자로 바뀌었습니다. 시점이 언제부터였느냐 하면 마가 오순절 다락방 성령 충만함을 얻고 난 이후부터였습니다. 성령 충만 받기 전의 베드로와 성령 충만 후의 베드로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그에게는 성령 충만함이 있습니다. 지금 그의 가슴에는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유대인의 시간으로 제9시에 기도하러 회당에 올라갑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행 2: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만나게 됩니다. 그가 무엇을 얻을까 하여 베드로를 바라볼 때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2:6)”라고 할 때 놀랍게도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나게 됩니다.
▶문제는 이전에는 역사했는데 지금은 왜 역사하지 않을까? 라는 현실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고 동일한 예수님의 능력이 다른 것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말씀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2024.11.03.주일오후예배).
▶안식일입니다. 한쪽 손 마른 이 병자는 안식일에 대한 이론, 전통, 율법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회당에 들어간 것은 안식일을 지켜야만 한다는 율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혹시나 회당에서 기적과 같은 일이 나 같은 저주받은 자에게도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조그만 기대하고 있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막12:3). “한가운데에 일어서라”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막3:4). 아무도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게 말 많고 전통과 율법에 능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왜 나서서 답을 하지 않을까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4절)의 물음에 누구도 말하는 이 없었습니다. 손 마른 병자를 가운데 세워두고 예수님과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복잡한 전통과 율법을 두고 다루는 내용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관심은 종교적인 율법이나 사람들이 세운 전통보다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사람에 대한 애정과 따뜻함, 그리고 그들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에 대하여 탄식하셨습니다(2024.11.03.주일아침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