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가황이라고 불리는 나훈아의 노래 중에 ‘테스 형’이라는 노래가 있다. 대중가요이지만 철학적 요소를 담아 부른 노래로서 많은 사람이 공감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도 한 노래이다.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 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라는 가사를 접하게 된다. 노래 가사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순간 생각하기를 이러다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노랫말로 나오지 않을까 하는 비약적 생각을 하며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생각해본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가 한 말로 유명하다. 그는 신 앞에서 사람의 지혜는 보잘것없으니, 늘 겸손한 자세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자신의 무지(無智)를 아는 것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출발점이라 강조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들은 만물의 본질을‘자연’에 두었다. 이에 반해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 곧 인간의 초점을 맞추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의 관심과 철학의 주제를 ‘자연’에서 ‘인간’으로 전환한 혁명적 메시지였다. 이 문장은 깊은 의미를 지니며, 인간의 존재와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자기 인식과 자아 성찰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여러 가지 뜻이 있고 해석하는 부분이 있지만, 인간이 자신의 한계와 불완전함을 인식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곧 인간의 내면과 정신세계를 통하여 행복과 만족감을 찾아야 함은 물론 자기 인식과 겸손한 태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를 보면, 소크라테스의 명언을 새롭게 상고할 시간이라고 여겨진다. 우리 정서의 아름다운 미덕인 겸손이 실종된 것 같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흔히 겸손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 가문에 이르기까지 겸양의 미덕을 지켜왔다. 표현 방법이 그저 '부족합니다', '많은 지도편달 바랍니다', '제 자식놈입니다'라고 했고 칭찬을 받아도 '늘 모자랍니다'라고 몸을 낮추고 겸손함을 나타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들의 칭찬에도 부모는 자녀를 다시 낮추는 겸손의 예는 얼마 전까지 분명 있었는데 지금 어디로 사라졌는지 너무도 아쉽다. 세상은 내가 보는 대로 존재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면 모두 아픈 사람만 보인다. 이렇듯 뉴스를 보면 정치판은 온통 정쟁하는 사람들만 보인다. 언론매체에서 전하는 소식을 시청하다 보면 정신건강에 해로울 만큼 피곤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겸손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언어, 국가 지도자들의 품성과 품위, 나아가서 국민의 대표로서 겸손의 지도력을 보여줘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옛 노래 가사처럼 '무너진 사랑탑'이 되었다.
겸손(謙遜)은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존중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자신보다 뛰어난 자들이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한다. 회남자(淮南子)는 중국 서한 시대 화남 왕 안(安)이 빈객들을 모아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강물이 모든 골짜기의 물을 포용할 수 있음은 아래로 흐르기 때문이다. 오직 아래로 낮출 수 있을 때야 결국 위로도 오를 수 있게 된다.'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 ‘바다’이다. 그래서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 결국 바다로 간다. 가장 낮은 바다는 지구의 표면을 70%나 차지하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존재이다. 겸손한 사람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귀한 역할을 감당한다. 성경을 보면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8:12)' ,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라고 교훈한다. 겸손한 사람은 가장 낮은 사람 같으나 가장 큰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문자로만 존재하는 단어가 아니라 생활 속에 겸손이 우리의 한 몸처럼 되어 사회적 조화와 통합이 유지되기를 간절한 바람으로 기도한다.(2023.07.25.)
오래전부터 인생을 논할 때 ‘광야(曠野) 같은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광야라고 하는 뜻은 ‘텅 비고 아득하게 너른 들’ 또는 ‘황량하고 거친 모래바람이 부는 곳’이라는 뜻이다. 인생을 광야라고 하는 삶의 현주소가 어렵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런데 광야라고 하는 단어는 문학과 시의 표현으로 쓰이거나 기독교에서 성서의 배경으로 아주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기 드문 용어이기는 하나 신앙적 면에서 인간에 대한 물음에 매우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광야는 우리가 살 수 없는 황량함과 고통의 땅으로 생각한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광야라고 하는 곳은 건조한 사막과 같아서 살인적 더위는 물론 뱀과 전갈의 위협이 있을 수 있으며 그늘진 곳과 물을 찾기가 어려운 곳이다. 한마디로 무서운 고통의 땅으로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메마르고 어려운 처지로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광야 같은 인생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광야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 그곳은 아주 의미 있는 장소임을 그 단어에서 깨달음을 준다. 히브리어로 '미드바르'(MIDBAAR)의 뜻은 광야이다. 그리고 '미드바르'(MIDBAAR)의 동사형은 '다바르'(DABAAR)이다. '다바르'란 동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한다"라는 의미이다. '미'(곳, 장소)+'다마르'(말씀)의 합성어로서 '미드바르'(MIDBAAR)는 광야라는 뜻이며 그들에게는 황무지, 거친 땅, 거친들, 불모지, 사막이다. 그곳에는 의지할 것도 즐길 것도 아무것도 없기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귀를 기울이는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광야는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척박하고 고통스러운 곳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말씀이 있는 곳이 광야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육의 눈으로 판단하였기에 광야를 싫어하고 불평하였지만, 모세는 믿음과 신앙의 눈으로 보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과 율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MIDBAAR(광야)’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 곳으로 기억한다.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었을 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광야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장소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지식, 철학, 능력, 힘을 통하여 살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순종훈련과 나그네 삶의 훈련을 하였다. 이곳에서 우리 안에 있는 육체적인 속성인 불평, 원망, 불순종, 교만, 탐욕의 습성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훈련장이었다. 인생을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심의 깊은 뜻이 있는 곳이 광야이다.
성경에서 광야가 지니는 의미는 두드러진다. 아브라함은 당대 최고의 문명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 광야로 나아갔다. 모세는 40년 세월을 미디안 광야에서 자신의 영적 내공을 길렀다. 엘리야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서 천사의 위로를 얻었다. 야곱은 광야 벧엘에서 하늘에 닿은 사다리 꼭대기 위에 서 계신 하나님을 보았고 그 음성을 들었다. 다윗도 정처 없이 떠다니는 광야의 생활을 하였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며 시험을 이기었다. 예수님께서 뱃세다 광야에서 굶주려 있는 군중들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였다. 바울은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을 지내며 자신의 과거 단절과 새 생명을 가진 자로 사는 삶을 준비하였다. 광야가 아니었다면 내 혈기, 고집, 교만, 탐욕, 성질, 모난 성품, 위선, 가증, 자존심 등 변화될 수 있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애쓰고 힘쓴다고 겸손해지고 성질이 죽는 것은 아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는 지경까지 이르러야 비로소 조금 겸손해질 수 있다. 광야는 내 자아가 죽는 장소이다. 광야는 나를 단련하는 장소이다. 광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광야 생활은 고난 같으나 은혜이며 유익이다. 광야는 오히려 축복의 현장임을 교훈해 준다. (2023.07.24.)
모든 사람이 바라고 꿈꾸는 것처럼 행복한 삶이 되기를 갈망했다. 누구나 눈물의 그릇이 있듯 눈물만큼이나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치열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급변한 세상에서도 숨 가쁘게 달려오다 보니 행복이 주변에 있는지 잘 몰랐다. 가져야 행복하고, 채워야 행복하고, 넘쳐야 행복한 줄 아는 관념에 사로잡혀 행복 타령을 하고 살아온 것 같다. 긴 세월이 흐르고 나서 살아온 날보다 사는 날이 적음을 헤아리고 실존의 의미를 직시하면서 행복이란 정체를 재해석하게 되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파란 하늘을 보는 것도 행복이며, 오늘 하루 숨 쉬는 것도 행복이며, 부부가 함께 있고 자녀들과 함께하는 것, 살아있는 자체가 행복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전에는 존재감을 나타내려고 했지만, 지금은 내 마음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질 때 오히려 편하다. 복잡하지도 않으며 단순할 때 마음이 더 행복한 무엇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접근하면 비움의 영성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전에는 무엇이든 채우려 했다. 비움과 채움의 균형이 맞지 않음으로 내적 갈등을 많이 느끼기도 하였다. 존재가 넉넉한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힘쓰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이미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가득 차 있다는 말이 아니다. 세월이 주는 깨달음이 모난 인생의 부분을 많이 깎아내고 다듬어 주었기에 소소한 행복이 눈에 보이고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실제 생활에서 경험으로 터득한 깨달음이 있다.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채울 때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잃어버릴 때 행복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느끼게 되었다. 옛날에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내일 비가 오려나! 비가 올 것 같다”라고 말씀하시면 대체로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내렸다. 너무나 신통해서 ‘나도 신경통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했었다. 지금 생각하니 건강을 크게 잃어버린 것은 아니나 면역력이 떨어지고 젊음의 싱싱함을 떠나보낸 후 비로소 그때의 건강이 얼마나 행복했음을 지나온 뒤에 깨닫게 되었다. 세상 이치가 그렇듯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자유와 행복이 있다. 사람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땅 위로 올라올 때 행복은 사라진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잃어버린 후에, 떠나보내고 사라진 후에야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한 박자 늦은 미완성 인생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영국 속담 중에 "행복은 사라진 후에야 빛을 낸다."라는 말이 있다. 행복의 실체를 보고 만질 수 있다면 그것이 떠나가기 전에 소중히 여기겠지만 행복은 언제나 떠나가면서 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행복의 본질은 깨닫는 데 있음을 교훈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행복할 것 같지 않은 슬픔이 불청객처럼 찾아올 때도 있다. 기쁨은 즐거움을 주지만 슬픔은 나를 성숙하게도 해준다는 것이다. 내가 아플 때 다른 사람의 아픔도 알 수 있고 아픔을 알기에 위로해 줄 수 있으니 위로의 사람으로 사는 것 역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흔히 사람들은 행복 지수를 말한다. 잘사는 나라인데도 행복 지수가 낮은 국민이 있고, 형편이 어려운 나라임에도 행복 지수가 높게 나타나는 국민도 있다. 삶의 조건과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롭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행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살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인간의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항상 생각과 기준의 뿌리에서 출발했다. 국민소득 3만 불이 넘는 우리나라에서 자살률이 높다. 사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 우리 국민이 객관적인 풍요 속에서도 행복하지 못할까?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자기 정체성의 문제, 사고방식의 문제로서 그것은 결국 가치관의 영역으로 압축된다. 다시 말하면 행복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그러므로 실제로 행복하여지려면 기준과 관점으로 전환해야만 한다. 행복은 거창한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 행복이란 오늘이라는 일상 안에 있다. 행복을 발견하고, 누릴 줄 아는 지혜로운 삶이 매일 필요하다.(2023.07.22.)
요즘 나도 모르게 입가에서 반복되는 노래가 있다. 제목이“선한 능력으로”라는 곡이다. 이 노래는 차분하기도 하지만 순간순간 폐부를 찌르는 듯한 깊은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 가사 내용이 숙연해지기도 하면서 왠지 마음이 아파져 온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옥중 생활 가운데서 그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과 같은 현실에서 이처럼 고요함과 평안을 기록한 편지의 마지막 내용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신학대학에서 학문을 익히는 신학도라면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라는 신학자를 공부하게 된다. 조직신학이나 윤리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 시대의 위대한 신학자이며 저술가인 그의 사상과 삶을 통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본회퍼의 신학은 머리와 가슴으로만 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치 정부의 부당함에 저항하며 신학과 신앙의 양심으로 살았다. 본회퍼는 독일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의 목사이자 신학자로서 히틀러 정권하에서 반 나치스 운동을 펼쳤다. 그가 잠시 미국에 갔을 때 주변 사람으로부터 미국 망명을 권유받았으나 거부하고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귀국하였다. 독일이 점점 히틀러의 나치즘 광기에 빠져들 때 저항운동에 가담하여 나치 정권 전복을 위해 활동하다가 히틀러 암살계획이 실패하자 1943년 4월 5일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베를린의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본회퍼는 히틀러 나치 정권에 대해 ‘미친 운전자가 행인들을 치고 질주할 때 목사는 사상자의 장례를 돌보는 것보다는 핸들을 뺏어야 한다.’라고 했으며,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라고 주장했다. 미치광이처럼 운전하는 히틀러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한 문서들이 발견되어 나치 패망 3주 전 1945년 4월 9일 플뢰센베르크(바이에른)에서 39세의 젊은 나이로 처형당했다. 본회퍼는 당시 독일 교회의 능력이 약해지고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상실된 원인을 ‘값싼 은혜’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값싼 은혜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이 없는 신앙은 싸구려 신앙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으며 디트리히 본회퍼 신학은 행동으로서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삶의 실천이었다.
그가 죽기 전 약혼자에게 보낸 시의 원제목은 “1945년 신년에”(Neujahr)이지만 서두에 “선한 능력으로(Von guten Mächten)”라고 시작된다. 1944년 12월 19일 성탄절을 앞두고 쓴 마지막 글이다. 여러 교과서에 수록이 되었으며 독일의 교회음악가 지그프리트 피에츠(Siegfried Fietz)가 음을 붙여 만든 고백 찬송이다. 이 글은 본회퍼의 영성과 그의 내면세계가 영롱한 보석처럼 반짝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선한 능력으로’ 이 노래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불린다.
“선한 능력에 언제나 고요하게 둘러싸여서 보호받고 위로받는 이 놀라움 속에 여러분과 함께 오늘을 살기 원하고 여러분들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기 원합니다. 옛것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어두운 날들의 무거운 짐은 여전히 우리를 누르지만, 오 주님! 내몰려 버린 우리의 영혼에게 주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주옵소서. 주님께서 쓰라리고 무거운 고통의 잔을 가득 채워 저희에게 주셨으므로 저희는 그 잔을 주님의 선하고 사랑스런 손으로부터 떨림 없이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이 세상에서 기쁨과 빛나는 햇빛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저희는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며 저희의 생명을 온전히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어두움을 밝히신 촛불은 오늘도 밝고 따뜻하게 타오르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다시 하나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는 압니다, 당신의 빛이 밤을 비추고 있음을, 이제 저희 주변 깊은 곳에 고요가 편만할 때, 저희 주변을 보이지 않게 에워싼 세상에 온전히 울려 퍼지는 소리를 저희들로 하여금 듣게 하옵소서.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소리 높여 부르는 찬양을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의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Dietrich Bonhoeffer, Brevier. 1944년 12월) (2023.07.20.)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 비유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감동이 된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 중 자기 몫을 달라고 하여 재물을 다 모아서 먼 나라에 갔다. 거기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며 그 재산을 낭비했다. 모든 재산을 소비한 후 궁핍해진 그때 하필이면 그 나라에는 흉년까지 겹쳐 먹을 것이 없었다. 무절제한 삶의 결과는 비참했다. 죄의 노예이며, 어둠의 생활이 이었다. 흥청망청은 먼 이야기가 되고, 살기 위해 돼지까지 쳐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고 급기야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주린 배를 채우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세상 유혹 따라가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생각해보라! 그 모습이 어떠했겠는가? 그의 몰골, 초라한 모습, 그의 옷차림은 거지와 같은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렘브란트(Rembrandt)의 “돌아온 탕자” 그림에서 보듯 아들은 찢어지고 구멍이 뚫린 옷을 입은 채 맨발을 드러내며 꿇어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국 이런 누추한 모습으로 탕자는 “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생각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 여기서 아버지의 마음을 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여기에서 필자는 감동하는 포인트가 있다. 잘한 것이 없으니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지 않아도 좋다. 살진 송아지를 잡지 않아도 밥 한 그릇이라도 좋다. 그러나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라고 하는 대목에서 크게 감동을 얻는다. 옷을 입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자신의 몸을 가리는 기능을 하고, 아름다움을 뽐내는 패션의 기능을 하고, 몸을 더위와 추위 그리고 상처로부터 보호의 기능을 한다. 옷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아주 중요한 도구이다. 거지 차림의 덕지덕지 붙은 오물 가득한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혀주셨다는 것이다. 이 행위는 아버지의 마음이자 수치를 가리고 몸을 보호하고 신분을 회복시켜 주었다는데 많은 공감을 얻는다.
하나님은 옷을 입히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 입고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느라”라고 한다. 예수님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훗날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로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라고 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죄지은 인생에게 무한한 긍휼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논산에 거주하는 김종혁이라는 친구가 있다. 근간에 작곡을 많이 한다. 어느 날 악보를 위한 글을 요청하기에, 나의 인생이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와 같은 은총을 입은 것 같아 고백의 마음을 담아 작시를 하였다. 죄상이 가득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사죄의 은총인 보혈의 옷을 입혀주셨기에 “새 옷 입히니”라는 제목으로 작시하였는데 이 글에 찬송형식의 곡으로 새로운 옷을 입혀주었다.
『1. 주님의 보혈 내게 임했네! 놀라운 사랑 감격하네! 질그릇 같은 연약한 인생 싸매어 주는 주님 손길 한없는 사랑 어쩌다 알까 빚진 자 되어 감사하리 험한 세상에 주님 마음을 비추어 주는 등대 되리 2. 주님의 보혈 새 옷 입히니 놀라운 사랑 감격하네! 상처 난 인생 치유하시고 주님의 능력 입히셨네! 베푸신 은혜 한이 없어라 하늘을 향해 감사하리 어둠이 짙은 이 땅 가운데 생명의 말씀 통로 되리 3. 나의 나 됨은 주의 은혜라 내 마음 깊이 새긴 사랑 내 맘에 계셔 위로하시니 솜털과 같은 평안 얻네! 주님의 마음 내게 덧입혀 보혈의 은총 기뻐하리 이 땅 가운데 인도하시는 신실한 사랑 찬양하리』‘옷이 날개다’라고 하듯이 좋은 옷을 입히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2023.07.18.)
영국의 작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끝이 좋으면 만사가 좋다.”라고 말했다. 무엇을 하든지 처음보다 끝이 좋아야 하고, 시작보다는 결론이 더 중요하다. 비행기는 이륙도 잘해야 하지만, 착륙을 더 잘해야 성공적 비행이 된다. 만일 착륙이 잘못되면 이제까지 아무리 비행을 성공적으로 했어도 모든 수고와 노력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행기의 착륙을 잘하면 모든 승객이 손뼉을 치며 축하하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축구 경기에서도 보듯이 FIFA 상위의 팀은 조직이 잘 되어 있고, 실력 면에서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유명선수가 즐비하다. 이러한 팀을 상대로 이기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가 강팀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여러 차례의 위기를 극복하고 역전승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 그 경기는 부족한 점은 있었지만, 마지막을 승리라는 값진 결과를 얻게 되어 많은 칭찬과 박수를 받게 된다.
무슨 일이든지 끝이 좋아야 한다. 물건도 끝이 좋아야 명품이 되고 건물도 마무리가 잘되어야 좋은 건물로 완성된다. 끝마무리는 세심한 수고가 들어가지만 100%의 효과를 거두게 된다. 좋은 물건은 끝마무리가 깔끔하고, 좋은 회사는 끝까지 책임지며, 좋은 경기는 끝이 좋다. 이처럼 좋은 사랑은 끝까지 아름답고, 끝이 좋아야 명품, 명인, 명가가 되며 끝이 좋아야 인생이 아름답다.
사울 왕이 끝이 안 좋은 이유는 질투와 교만하였기 때문이며, 가룟 유다도 끝이 아름답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변절이다. 끝이 좋은 결과는 항상 감사로 나타난다. 끝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원망과 불평으로 끝을 맺는다. 끝이 좋지 않게 끝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보라! 늘 불만족하였다. 늘 원망하였다. 홍해를 건넌 후 순간 감격하다가 이후 마라의 쓴물이 있을 때 원망했다. 광야에서 양식이 없자 또 원망했다. 르비딤에서 마실 물이 없자 또 원망했다. 만나와 메추라기 싫증이 나서 원망했다. 정탐꾼을 보낸 후에도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 입만 벌리면 원망하였다. 포기하는 사람은 끝이 아름답지 못하였다.
‘피크엔드 법칙(peak-end rule)’이라는 것이 있다. 이 법칙은 이스라엘 출신의 심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대니엘 카너먼(Danier Kahneman)’이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논리를 말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의 기억은 가장 극적인 순간과 마지막 순간에 국한되며 전반적인 과정은 기억에 별로 남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결국 사람은 마지막 순간이 사람들의 기억에 가장 인상 깊게 남는다는 것이다.
70대 노인 이야기이다. 그의 일과는 노인학교에 나가서 그저 할 일 없이 잡담하거나 장기(체스)가 일상이다. 어느 날 장기 상대자가 없어 그냥 멍하니 있는데 젊은이가 지나가다 “할아버지! 그렇게 앉아 계시는 것보다 그림을 배워보시면 어떨까요?”라고 제안을 했다. 붓도 잡을 줄 모르고 배우기엔 너무 늦고 이미 나이가 일흔이 넘었다는 이유로 거절을 했지만, 젊은이는 "그림을 배우는데 나이가 문제 되지 않아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문제지요."라고 말하자 결국 미술실로 따라갔다. 근력이 약해진 탓에 붓을 잡은 손이 떨리기도 했지만, 오히려 조심스럽고 세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노인은 백한 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22회의 전시회를 열었고,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가 바로 사람들이 '원시의 눈을 가진 미국의 샤갈'이라고 극찬받았던 화가 ‘해리 리버먼(Harry Lieberman)’이었다. 아무리 늦게 시작해도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너무 일찍 삶을 정리하지 말라는 것이며 성공한 인생의 끝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조금 부족하게 시작했다고 할지라도 또한 진행 과정에서 더러는 어그러지는 일과 실패를 경험해도 끝이 좋으면 마지막을 아름답게 끝낸 성공한 사람이다. 역사도 끝이 좋아야 한다는 점에서 보여주는 교훈이 크다. 마지막까지 감동의 삶을 살수만 있다면 이 또한 복된 인생이다.(2023.07.17.)
오래전 '사랑의 동산'(Tres Dias) 프로그램에 참여한 바 있다. 섬김과 봉사의 정신을 체득하게 하는 영성 훈련이다. 입소하면서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듣게 된다. 첫째 지금부터 하루 동안은‘침묵’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휴대전화기 사용 금지이다. 셋째는 시계도 보지 말라는 것이다. 영성 훈련을 위한 이곳에 와서는 평소 생활을 다 끊으라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소식, 사업, 본인들의 계획을 여기에 연관시키지 말라는 뜻이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배정된 좁은 방에서 이 세상 혼자만의 세계가 형성된 듯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조금 전까지 입으로 모든 말을 쉼 없이 쏟아내었는데 지금, 이 순간부터 침묵 상태로 전환하니 갑갑함은 물론 여러 가지 교차하는 많은 생각과 느낌이 지금도 뇌리에 인상 깊게 남아있다. 영성 훈련 도입부에‘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자기 발견의 시간을 갖게 되며 자기 성찰을 하는 시간이었다.
침묵(沈默)은 '아무 말도 없이 잠잠이 있는 것 혹은 그런 상태'로 정의한다.' 한마디로 정적이고 평안, 고요한 상태 가운데에서 조용함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문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의미와 결부되는 경우가 많다. 돌이켜 보면, 침묵은 단순히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잠자는 사람에게 침묵한다고 하지 않는다. 기분이 상해서 상대와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침묵한다고 하지 않는다. 어떤 일에 몰두해서 생각이 너무 많아 잠시 말을 멈춘다고 해서 침묵한다고 하지 않는다. 침묵은 맑고 투명한 의식을 지닌 채 묵언하여 자신의 정체를 알아채고 내면세계를 돌아보는 것이다. 토머스 머튼은 "침묵에서 성인들이 성장하였고, 침묵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 안에 머물렀고, 침묵 안에서 하나님의 신비가 그들에게 알려졌다"라고 했다. 이런 면에서 여러 작품에서 종교적인 의미로 인용되기도 하였는데, 침묵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매스컴이 발달하기도 하지만 현대는 참으로 말이 많은 시대이다.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광범위한 비평으로 다툼을 이어가고 있다. 다변(多辯)이 능변(能辯)으로 인정받고 있는 시대이기에 상대적으로 말이 없는 사람은 무능력한 사람이요 또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다. 소셜네트워크는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관련 서비스가 급격히 발전하면서 자기 생각과 관심 분야를 공유하는 소통의 장으로 더 넓은 인간관계와 정보의 전달이 빠르다. 침묵과는 거리가 먼 시대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침묵과 말은 항상 대조되는 개념이다. 침묵 속에는 말이 들어있지만, 말속에는 침묵이 들어있지 않다. 또한 침묵 속에 들어있는 의미가 말속에 들어있는 의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넓고 깊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증명해주듯 익히 듣고 배운 교훈이다. 침묵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요구되는 덕목이다. 때와 장소에 맞게 침묵할 수 있는 사람은 금과 같이 빛나 보이고 돋보일 수 있으며 관계를 아름답게 맺어주기도 한다.
주변을 보면 자신의 감정을 지금 꼭 말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을 똑똑한 사람이라고 하고, 말을 절제하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고, 침묵하는 사람을 은혜의 사람, 도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영국의 비평가인 토머스 칼라일은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톨스토이는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보다 언제 어떻게 침묵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라고 했다. 히브리 사람들의 격언에는 "조잘거림은 나면서부터 배우지만 침묵은 좀처럼 배우기 힘들다."라고 하였다. 성서에는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잠 17:28)라는 지혜자의 말씀에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보는 능력을 보게 된다. 침묵을 배우며 성숙한 삶을 살라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의 성찰 없는 사람이 남을 생각할 수 없듯이 침묵의 시간이 없는 사람이 남의 영혼을 잔잔하게 할 수 없다. 삶의 분주한 일과 속에서 침묵의 방으로 들어가 보자. (2023.07.14.)
세계적인 비즈니스 컨설턴트 브라이언 트레이시(Brian Tracy)는 ‘백만 불짜리 습관’이라는 책의 저자이다. 그의 저서에서 밝히기를,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모든 성공과 실패의 95%를 습관이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성공하는 사람은 성공하는 습관을, 실패하는 사람은 실패하는 습관을 지녔다는 것이다. ‘좋은 습관은 갖기는 어려워도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고, 나쁜 습관은 쉽게 형성되지만, 실패로 몰아간다.’라고 정의했다.
습관(習慣)이란 ‘오랫동안 되풀이하여 몸에 익은 채로 굳어진 개인적 행동’ 또는 ‘학습된 행위가 되풀이되어 생기는, 비교적 고정된 반응 양식’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학습에 따라 후천적으로 획득되어 되풀이함에 따라 고정화된 반응 양식’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면으로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자기만의 습관이 있다. 그 습관이 좋은 것이면 괜찮은데 나쁜 습관이 문제다.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반복적인 일을 하다 보면 그것이 자기의 습관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습관이란 인간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영역에 퍼져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소소한 일에서 사회의 구조적 생활까지 보이지 않는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나쁜 습관을 버리지 못하면 나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요, 악한 습관을 버리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악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지닐 때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물론 삶의 질까지도 높아지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습관이란 벽에 부딪혀서 어느 날 결심과 계획을 하게 된다. 특별히 새해가 된다거나, 어떠한 심한 충격을 받았거나, 특별한 의미 있는 깨달음으로 결심과 계획을 실천하고자 하지만 우리 옛말에도 있듯이 ‘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나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 원인을 분석해 보면 결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 몸에 습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평소에 책을 읽는 습관이 전혀 안 되어 있는 사람이 새해에 굳은 결심만 한다고 해서 갑자기 독서광이 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습관은 끊임없이 반복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절대로 몸에 배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습관의 원칙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습관은 습관으로만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쁜 습관을 바꾸려면 반드시 그 반대되는 좋은 습관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며 또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습관이 되어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나쁜 습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 반대되는 행동을 이해하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반복하여 그것이 습관이 되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4:7)”라고 한다. 이 말씀은 너 자신을 훈련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 훈련(訓鍊)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를 보면 ‘재주나 기예 따위를 배우거나 익히기 위해 되풀이하여 연습함, 일정한 목표나 기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실천시키는 실제적 교육 활동, 남에게 어떤 재주나 기예 따위를 가르쳐서 익히게 함’이다. 군사훈련, 직업, 학문이나 정신 수양, 운동 등을 익숙하도록 되풀이하여 익히는 것을 말한다. 훈련이란 지금은 안되지만 앞으로 될 것을 믿고 반복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식이 성립된다. 〈지금은 안되지만, 훈련을 통해서 미래가 된다〉는 것이다. 연습과 훈련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반복되는 연습이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시행착오이다. 자전거를 타기 위한 연습은 곧 넘어지는 것이다. 많이 넘어진 사람이 결국은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훈련이란 언제나 시간과의 싸움이며 반드시 인내가 필요하다. 특별히 좋은 습관을 하나둘씩 만들어 가야 한다. 악기를 다루거나, 성악 하시는 분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루라도 연습을 건너뛰면 자신이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스승이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고 한다. 좋은 생활 습관을 하나둘씩 찾아 만들어 가면, 낭비되는 인생에서 알차고 행복한 삶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행복도 습관이다.(2023.07.10.)
칠순이 되신 분이 느꼈던 간단한 이야기다.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일 년 동안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이 한마디 해 주었는데, “지난 일 년 동안 너를 봐 왔다. 너는 앞으로 뭘 해도 잘해 낼 거야.” 그 감사한 한 마디는 내 영혼에 깊이 새겨지면서 칠십 평생 삶의 큰 힘이 되었다는 고백이다. 어린 학생의 모습에서 장래에 귀한 그릇이 될 것임을 표현하였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가리킬 때 여러 가지 비유적인 칭호를 사용한다. 많은 표현 가운데 ‘그릇’이라고 표현할 때가 많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고사성어에서도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 훌륭한 사람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뜻으로 사전적 의미로 大(큰 대) 器(그릇 기) 晩(늦을 만) 成(이룰 성)으로 직역하면,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성 있는 사람을 말할 때나, 큰 인물을 말할 때 그릇이 큰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릇’이라고 하는 것은‘무엇을 담을 수 있느냐’의 수용적 성격이다. 우리 옛말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란 표현이 있듯이 그 독이 아무리 크고, 예쁘게 생겨도 만약 밑이 빠져있어서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다고 한다면 그릇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겉모양이 아무리 좋고 큰 그릇이라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다면 더는 그릇이 아니다. 아무리 큰 그릇이라 할지라도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
또한 그릇은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사용할 그릇에 오물 찌꺼기가 묻어있거나 청결하지 못하면 사용할 수 없다. 오직 깨끗하게 씻겨져 있어야 쓸모있는 그릇으로 쓰임을 받을 것이다. 자신을 깨끗이 하면 깨끗한 인격의 소유자로 부끄러움 없이 떳떳하게 살아간다면 세상은 이처럼 깨끗한 그릇, 깨끗한 인격의 소유자를 찾는 것이다. 더럽고 추한 그릇은 결코 귀하게 쓰이거나 오래 쓰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직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만 쓰임 받고 환영받을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람은 그릇에 맞게 사는 게 맞다. 지가 아무리 노력해 봐야 저 큰 그릇을 절대 넘을 수 없다.’라고 한다. 열심히 노력해도 이루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쉽게 좌절한다. 작은 그릇이 큰 그릇이 될 수 없고, 큰 그릇이 작아질 수 없는 것처럼 내가 노력해 봐야 아무것도 안 되니까 포기한다는 것이다. 자! 이제 마음을 추슬러 보자. ‘돌멩이도 쓰임새가 있다.’ 했다. 세상 만물은 어느 곳 어디에서든 적재적소에 꼭 필요한 때가 있다. 비록 길가에 아무렇게나 놓인 돌멩이도 쓰임새가 따로 있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잔칫집에 일률적으로 보기 좋은 크고 똑같은 그릇을 사용한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성경을 보면,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다”(딤후 2:20)라고 기록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금 그릇과 은그릇 같은 것은 귀하게 쓰임 받고 나무 그릇과 질그릇 같은 것은 천하게 쓰임을 받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다. 나무 그릇 질그릇은 빛나는 그릇도 아니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큼 모양도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금과 은으로 만들었어도, 사용하지 않고 보관만 하는 그릇이라면 그것은 ‘장식품’은 될지언정 편리하게 사용되는 그릇은 아니다. 그릇은 크든지 작든지 간에 모두가 쓰이는 용도가 있다. 진열장 속이 아니라, 제 몫에 따라 쓰이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그 그릇이 낡고 오래되었든, 그 그릇이 크든 작든 간에, 또 그 그릇이 천하든 귀하든 상관없이 요긴하게 쓰이는 그릇, 필요로 하는 이 시대의 그릇들이라면 다양성 속에 일치를 이루는 위대한 조화가 아닐까? 묻고 싶다.
어느 분은 “나는 장롱에 숨겨둔 비단이 되기보다 마루 구석에 놓인 걸레가 되고 싶다.”라고 고백을 했다. 민족지도자 이승훈 선생은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민족을 위한 걸레가 되고 싶다. 민족의 더러움을 씻어주고 싶다.” 걸레면 어떠냐는 것이다. 천한 걸레라도 쓰임을 받는다면 그것은 귀한 것이다. 큰 그릇이 아닐지라도 필요한 곳에 다양하게 귀히 쓰임을 받는 그릇이 되어보자.(2023.07.05.)
국회 대정부 질문 시간은 전쟁과 같은 설전과 고성이 난무한 것이 어제오늘 문제가 아니다. 그만큼 국민은 피로감을 많이 느낀다. 6월 14일 오후 3시 20분쯤 제407회 국회(임시회) 제3차 본회의 교육·사회·문화 대정부질문에서 국회 본회의장은 마법처럼 정화가 된 느낌이다. 이 순간은 끝없이 이어지는 고성도 없고 야유도 사라졌다. 오히려 여야 의원들 감동의 박수가 있었다. 김예지 의원의 발언에 오랜만에 가슴 뭉클한 정치권의 모습에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과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설득력이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시각장애인이다. 안내견 ‘조이’의 도움을 받아 본회의장 발언대에 섰다. 조이를 옆자리에 앉힌 뒤 손가락으로 점자를 읽어 내려가며 질의를 시작했다. 장애인으로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비례대표 의원이라고 말한 뒤 ‘장애인 학대 범죄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엄중한 처벌을 위해 법률제정 필요성, 장애인 정책의 방향과 정부의 역할 등을 질문’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코이(Koi)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환경에 따라 물고기 크기가 달라진다는 ‘코이의 법칙’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작은 어항 속에서는 10㎝를 넘지 않지만 수족관에서는 30㎝까지, 그리고 강물에서는 1m가 넘게 자라나는 그런 물고기입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기회와 가능성 그리고 성장을 가로막는 다양한 어항과 수족관이 있습니다. 이러한 어항과 수족관을 깨고 국민이 기회의 균등 속에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강물이 되어주시기를 기대하면서 저 또한 우리 사회의 소외된 분들을 대변하는 공복으로서 모든 국민이 당당한 주권자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 의원이 발언을 마치자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의원들의 박수가 나왔다. 일부 의원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김예지의 ‘물고기 연설’이 삿대질 대신 기립박수 보냈다. 어항의 크기에 따라 몸집이 달라지는 물고기‘코이' 이야기를 통해서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사회적 약자의 성장을 가로막는 다양한 어항과 수족관이 있음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고 정부가 더욱 큰 강물이 되어주길 기대한다는 큰 울림을 주었다.
코이는 성장 억제 호르몬 분비가 가능해서 물의 양, 깊이 등 주변을 확인한 후 거기에 알맞게 몸 크기를 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이가 자라는 물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듯 사람 또한 주변 환경과 의지에 따라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과 꿈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게 ‘코이의 법칙’이다. 다시 말하면 규범 표기는 미확정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제한되고 갇혀있는 어항이나 수족관 세상이 아니라 강물이라는 꿈의 크기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또 더 나아가 사회적 약자를 위해 포용하는 여러 가지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된다면 이것이 균등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감동적인 일상이 될 것이다. 지극히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사회가 될 때 약하게 보이는 그들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임을 말하는 뜻은 우리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아직도 약자들은 여전히 약자로서 살아간다. 내 자식이 이런 약자라고 하면 얼마나 가슴 아플까? 약자들이 장애물을 극복하고, 도전을 극복하고 성장의 기회가 되어 장애가 걸림돌이 될 수 없는 감동의 이야기가 사회 곳곳에서 들려오기를 최소한의 노력해야 할 것임을 오늘 숙제로 던져준 것이다.
성경을 보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라고 말씀을 한다. ‘짐’으로 번역된 헬라어 바로스(βάρος)는 무겁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뜻한다. 이 말이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수고’ 또는 ‘중한 것'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라’는 말은 현재 능동태 명령법으로 ‘한 번뿐만 아니라 계속하여지라’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힘든 일들을 살피고 같이 나누는 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행동 규범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2023.06.28./2023.07.03.거제신문)
오래전 도시에 거주할 때 농사와 별로 관련이 없었다. 이 말은 농부의 마음과 땅의 원리를 잘 몰랐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이곳 거제면에 살면서 농사를 전문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 텃밭을 가꾸어 식물을 키우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어느덧 일상화가 되어 필자도 흙을 만지며 씨앗이나 모종을 심고 땅의 신비한 생명의 기운을 접하게 된다. 거짓말하지 않는 땅의 속성을 보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농사를 통해서도 오묘한 비밀을 캐내게 된다. 농경시대에는 농사가 주요 산업이었기에 농사짓는 것이 매우 중요함에 대해 긴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러나 지금은 정보화 시대를 넘어 4차 산업혁명 시대로 사회가 복잡하고 다양화함에 따라 어느 특정한 산업의 발전이 우리의 관심사이기는 하나,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농사는 인류가 걸어온 보편적 삶의 원천이요, 땅과 신체가 하나이면서 인간의 먹거리가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농사에는 ‘심고 거둠의 법칙’이 있다. ‘심음과 거둠’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법칙이다. 콩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것이다. 사과나무에서 사과 열리고 배나무에 배가 열리는 것이다. 수박을 심은 곳에서 수박을 거두고, 땅콩을 심은 곳에서 땅콩을 거두고, 감자를 심은 밭에서 감자를 추수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법칙이다. 세상 어디에도 우연은 없다.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심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추수는 씨앗에서부터 시작된다. 무엇을 얼마나 심었느냐에 따라 결실이 결정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심지 않은 밭에서 무언가를 거둘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이 법칙을 하나님이 제정하신 거둠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 말씀 중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는 이 말씀은‘심는 법칙’이 있다면 ‘거둠의 법칙’도 함께 간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농사에만 한정되어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생의 교훈이기도 하다. 만일 정직과 깨끗함을 심는다면, 나중에 아름다운 인격을 거둘 것이다. 반면에 수년 동안 교만과 부정직과 성냄과 무절제의 씨를 마음대로 뿌리고 다닌다면 결국 그로 인해서 쓰디쓴 열매를 거두기 시작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선(善)을 행하면 선(善)의 결과가, 악(惡)을 행하면 악(惡)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말’이다.
심음과 거둠 사이에는 일정한 간격의 시간과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듯이 심는 것과 거두는 것은 시간적 간격이 있을 뿐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이다. 한 인간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일생의 행적을 인생 이력서에 다 담고 있다. 과거의 어떤 행위가 현재와 관련이 되어있으며, 또 현재의 행위가 미래와 관련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기에 만고불변(萬古不變)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어제의 행실이 씨앗이 되어 오늘의 열매가 되고 또 오늘의 행실은 또 다른 씨앗이 되어 내일의 열매로 나타나게 된다. 아주 오래전 잘못된 일들이 소환되어 낭패를 보는 일들이 많아졌다. 국회 인사청문회나 유명인들의 생활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던 사람이 어느 날 옛날 어떤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된다. 자신들이 심은 것을 잊고 살았지만 심는 대로 거두게 되는 진리를 역류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심는다는 것은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 않은 씨앗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그 자체뿐이지만 심으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거둘 것이다. 오고 가는 세대에 나중 열매를 기약하는 큰 의미가 있기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불변의 법칙을 기억하면서 묵은 땅을 갈아엎고 파종을 준비하는 농부처럼, 이 난감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사랑과 평화의 씨를 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남은 생을 그렇게 살아보자.(2023.06.25.)
깊은 바다 한가운데 쇠붙이를 떨어뜨리면 쇠붙이는 금방 가라앉는다. 그러나 쇠붙이에 스티로폼(영:Styrofoam)을 묶어 바다에 빠뜨리면 쇠붙이는 가라앉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가라앉고자 하는 쇠붙이의 중력(重力)보다 뜨고자 하는 스티로폼의 부력(浮力)이 더 크기 때문이다. 물론 물리학의 기초적 원리이지만 우리 인생 삶에도 이러한 중력과 부력이라는 원리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은 쇠붙이와 같이 물에 빠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많이 느끼며 산다. 또한 질그릇처럼 쉽게 깨어지기 쉬운 존재이기도 하다. 삶의 여정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칠 때,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할 때 쉽게 포기하고 가라앉으려 한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 가능성이 안 보여서 미래의 문이 닫혔다고 느껴진다는 이유로 그냥 가라앉는 일이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는가?
현실적으로도 누구에게나 바다에 빠질만한 무거운 인생의 짐들이 있다. 부양해야 할 가족으로 인해 경제적 문제로 허덕일 때, 내가 품은 꿈이 점점 멀어져 갈 때, 몸에 지니고 살아야 하는 질병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로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문제들로 인해 가라앉기 쉽다. 어디 그뿐인가? 열등감으로 가라앉으려 하고, 상처로 가라앉으려 하고, 홀로 망망대해에 버려진 듯한 생각으로 슬픔과 거절 감의 바다에 빠져둘 때가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실개천 같은 일상의 일들이 내기는 쉽게 건널 수 없는 크고 깊은 강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런 일들을 경험하게 되면 정신마저도 혼미해지기도 한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아무리 깜깜한 밤이라도 자세히 보면 별 하나는 떠 있다"라고 했다. 이 명언은 힘들고 어려울 때 큰 위로와 용기가 되는 말이다. 우리 인생의 처한 상황이 아무리 캄캄할 때라도 별 하나를 보라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속담을 보아도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다.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는 것이며, 아무리 어려운 일에 부닥쳐도 살아나갈 희망은 반드시 있다는 뜻이다. 낙망이 절망이라면 갈망은 희망이다. 낙망의 중력이 우리를 날마다 바다 깊은 곳으로 끌고 갈지라도 갈망이라는 부력으로 다시 떠올라야 한다. 당신의 인생 중에 이해할 수도 없는 엄청난 고난이 닥칠 때, 뼈를 깎고 살을 에는 고통이 다가올지라도 우리의 할 일은, 문제의 바다와 고난의 바다에 빠져들지 않기 위하여 날마다 갈망이라는 부력을 키우는 것이다. 깊은 바다 심해 속에서 작은 물고기가 생존하며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바닷속 수압보다 물고기 속의 압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중력은 하강하는 에너지로써 상승하는 은총에 대비하는 개념으로 중력이 땅의 힘이라면 부력은 하늘의 힘이다. 땅의 힘이 아무리 우리를 끌어당길지라도 하늘의 힘이 오늘도 우리를 끌어 올리며 떠오르게 한다는 신앙 세계의 가르침이다. 또한 이 부력과 같은 상승 운동은 종교적 세계 즉 영적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에너지의 흐름이기도 하다. 살 소망이 없어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마지막 방법으로 자신을 내려놓고 믿음 생활을 통해서 다시 살 희망을 품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부력의 힘을 체험하게 된다. 성경 이야기 속에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신실한 하나님을 기억하게 된다. 광야에서 모세를 찾아오신 하나님, 음란의 죄악에서 고멜을 놓지 않으시며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탕자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병든 자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를 향하여 불철주야 다가오는 무수한 압력들로부터 우리가 터지고 깨어지지 않을 충분한 이유는, 우리 속의 믿음의 압력을 올리는 방법을 터득하기 때문이다. 질병의 압력, 물질의 압력, 가시의 압력, 상처의 압력들이 쉬지 않고 누를 때, 우리 속에 있는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압력을 높여 극복하는 방법을 배워 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포기하지 않는 또 하나의 부력의 힘이다.(2023.06.22.)
살면서 주변에 상처(傷處)받았다는 분들이 참 많다. 그런데 상처가 치유(治癒)되었다고 하는 분을 찾기 어렵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크고 작은 자신만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가족들로부터 생긴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환경으로부터 생길 수 있다. 특히 어린 시절에 마음의 상처를 받아 지금까지 치유되지 못한 문제들을 가슴에 쌓아 놓고 생활하다가 그것이 뭉쳐서 한이 되고 병도 생기는 것이다. 같이 싸울 수 없을 때, 해야 할 말들을 참을 때, 억울한 감정이 숨어있을 때 그것이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상처가 되어 분노로 매듭이 생기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인생 여정에 있어서 상처는 누구에게나 불청객으로 찾아오는 필연적인 하나의 과정이다. 그런데 문제는 잘 치료받아 아문 상처는 오히려 영광될 수 있지만, 아물지 않은 상처는 평생을 두고 치명적인 걸림돌로 남을 수 있다. 그렇기에 조그마한 상처라도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큰 상처라 하더라도 잘 치료하고 보듬어 주면 완치가 되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좁쌀만 한 상처라 하더라도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그 상처는 고질병으로 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 육신에 직접적인 상처가 생겼을 때 그 자체는 생명의 위협이 되지 않지만 작은 상처가 환부로 인해 온갖 세균 침투하여 염증을 일으키게 되고, 그 염증을 그대로 두면 여러 가지 합병증을 유발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상처의 속성은 한 번 받으면 그것이 치유되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않고 우리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은 우리 속에 그냥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자라난다. 그리고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밖으로 나온다. 상대방과 좋은 관계를 깨뜨리고 아픔을 만들어 버린다. 상처 입은 마음은 불안과 열등감, 자존감의 상처, 자기방어의 벽, 자신감의 상실, 불신 등을 무수히 만들어 낸다.
식물학자들에 의하면 모든 나무에는 나이테가 있다고 한다. 나무를 절단해 보면 그 나무가 성장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나이테 안에 자료로 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아주 가물었을 때 나타난 표시이고, 여기에 나타난 나이테는 벼락을 맞았을 때이며, 아주 비가 많이 왔을 때, 병충해가 심할 때, 불이 났을 때 등 나타난 부분들이 나이테라는 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한 나무 상처의 질곡들은 대부분 나무의 외형에 나타나 있지 않고 나무의 가장 깊은 심층부에 흔적으로 남게 되는 비밀이 있다. 우리 인생도 다르지 않다. 외형으로야 담담하게 살아가지만, 살포시 가슴을 헤집어 보면 굵직한 상처와 질펀한 응어리들이 처리되지 못하고 회복되지 못한 과거의 쓴 뿌리와 상처들이 한과 억누른 분노가 되어 나만의 자서전으로 남게 된다.
문제는 치유와 회복이다. 상처가 커도 치유가 되면 유익하지만, 작은 상처라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라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내가 받은 상처가 또 다른 상처를 잉태케 한다. 다시 말하면 상처가 많으면 상처를 잘 받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에 익숙하게 된다. 그래서 상처 입은 사람은, 관용이 어렵고 포용이 안되는 공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손에 가시만 박혀도 우리의 신경은 온통 예민해질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고 배려할 여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상처는 인생살이의 한 부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이며 절대로 자신만 겪는 그것으로 생각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상처를 통하여 내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잘 아문 상처는 다시 다가올 상처에 대한 예방주사가 되는 것이다. 또한 상처받아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깊이 이해하고 실제로 도울 수 있다. 이 좁은 땅에서 서로 부딪치며 살다 보니 상처가 서로 많은 것이다. 물론 누구든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입은 상처를 자신이 어떻게 극복하느냐 따라서 그 아픈 상처가 훈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내가 행복해지고 남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도 한다. (2023.06.12.)
백합이든, 장미든 그 어떤 꽃이라도 활짝 피어 그 자체만으로도 순결하며, 정열적인 품위를 보이게 한다. 어느 날 순간 백합처럼 하얗고 장미처럼 붉은 꽃들이 땅에 떨어지면 아름다움이 오래 보존되지 못해 안타까운 듯 시선이 나무 아래를 향하게 된다. 이와 함께 바람결에 스쳐 지나간 그 자리에는 짙은 향기로도 남게 마련이니 그것은 곧 흔적이다. 이처럼 사람도 머물다 떠나간 그 자리는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마치 결혼식이 끝나면 꽃잎과 꽃가루가 남는 것과 같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왠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떨어지는 꽃처럼 얼마나 남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손주들을 볼 때마다 나를 대신한 생명의 연장이라고 하는 오묘한 흔적으로 느껴진다. 시인은 시로 말하고 화가는 그림으로 말한다. 또한 음악가는 오선지로 말하듯 생명 있는 동안에 어떤 흔적을 남길까에 대한 숙제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스티그마(Stigma, στίγμα)’는 ‘흔적’이라고 표현하며 원래 뜻은 ‘낙인’이다. 낙인은 소유권을 나타내는 불에 달군 인장이다. 헬라어의 명사‘스티그마’는 소유를 표기하기 위해 가축이나 노예의 몸에 인두로 지진 자국을 가리키는 동사‘스티조(stivzw: 찌르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로서 찌른 자국, 점, 표지를 의미한다. 옛날 노예가 팔리던 시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물건과 소유물로 취급받던 때에 그 사람이 평생 노예이며 특정한 소유임을 확인시키는 낙인이었으며 인두로 종의 몸에 문신을 새기는 것으로 고대 헬라 문화권이나 로마 문화권에서 사용되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Stigma, στίγμα)을 몸에 지녔다고 고백하며 자랑했다. 이는 복음 사역을 위해 당한 고난과 상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라고 말한다. 바울의 몸에 생긴 흔적은 사실 여러 교회로부터 받은 핍박으로 난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바울 스스로는 그것을 노예나 짐승, 반역자에게 사용된 부정적인 의미로서의 ‘스티그마’로 표현했다. 이러한 이유는 자신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시며 그에게 속하였다는 고백이며 전도자의 삶을 사는 인생임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었다.
길리기아의 최대도시 다소(Tarsus) 출신이며, 당시로는 최고의 교육인 가말리엘 문화에서 엄격한 방식에 따라 교육을 받았으며, 유대인으로서 헬라에 정통하였으며, 또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자로 이 모든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지만, 학벌과 문벌을 포기하고 비록 처절하고 비참한 노예와 같은 삶일지라도 그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써 이같이 표현한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흔적을 내 시간에 남겨야 한다는 소원과 한없는 부끄러움으로 성찰하게 된다. 나 자신이 바울의 ‘스티그마(Stigma, στίγμα)’를 머리로만 인식하고 많이 외쳐도 보았지만 진작 가슴으로 내려와 외친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반성하게 된다. 착한 행실로 고귀한 흔적을 남겨야 부끄러움이 없지 않을까 하는 문제는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조급한 마음이 든다. 어떤 현상이나 실체가 없어졌거나 지나간 뒤에 남은 자국이나 자취가 흔적 일 텐데 상처가 가득한 이 세상에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와 평안함을 함께 나누는 흔적이라도 남겨야 할 것 같다. 아픔으로 흘리는 눈물 자국과 같은 흔적이 아니라 절망적이고 고달픈 순간일지라도 희망을 나누는 소중한 흔적들이 남겨진다면 한층 더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기셨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흔적, 눈물로 기도하며 손들어 찬송하던 흔적, 가슴을 설레며 말씀에 춤을 추던 흔적들을 다시금 끄집어내 살펴보면서 내 영혼에 주님의 흔적을 다시금 남기기를 소원해 본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의 마지막에 기독 도는 "나의 이 모든 상처를 주님 앞에 훈장처럼 가져가겠다"라고 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흔적으로 간직하고 싶다.(2023.06.05.)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위기로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삶을 살아왔다. 일상이 멈춰버린 듯 두려움을 동반하며 긴 터널을 지나온 생활이었다. 2020년 1월 20일 코로나19 국내 첫 확진자 발생을 전후로 나라 전체가 코로나19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국민은 전에 겪어보지 못한 위기 상황을 헤쳐나가야만 했다. 감염의 두려움, 일상을 상실한 데 따른 혼란, 비자발적 격리에 따른 고립감, 경제난의 어려움 등이 뒤섞여 많은 이들이 우울감을 느꼈다.
3년 4개월가량 지속된 코로나19 유행은 3천 100만 명이 넘는 확진자와 3만 4천 명이 넘는 사망자, 막대한 경제적 손실 외에도 우리 사회에 여러 유형·무형의 상처와 그림자를 남겼다. 전 세계 227개국에서 6억 9,000만 명이 코로나19에 감염됐고, 69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검사‧추적‧치료(3T)와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고집했던 K-방역을 자랑하던 우리의 최종 성적표도 실망스러울 정도로 초라했다. 인구의 60%가 넘는 3,200만 명이 감염됐고, 3만 4,700명이 사망했다. 감염자의 규모로는 미국·인도·프랑스·독일·브라질·일본에 이어 세계 7위고, 인구당 감염률로는 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프랑스에 이어 세계 4위다. 특히 뒤늦게 찾아온 델타와 오미크론 변이에 속절없이 당해버린 결과였다. 한마디로 코로나19 팬데믹이 남긴 상처는 참혹했다.
이제 힘겨웠던 팬데믹(Pandemic) 시간이 지나 엔데믹(Endemic)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난 5월 5일 세계보건기구(WHO)가 공식적으로 코로나19(COVID-19) 팬데믹의 종식을 선언했다. 2020년 1월 30일 국제 공중보건 위기 상황(PHEIC)을 선포하고 3년 4개월 만의 일이다. 우리 정부도 지난 6월 11일 공식적으로 코로나19의 종식을 선언했다. 이제 코로나19는 독감(인플루엔자)과 같은 엔데믹(풍토병)이 돼버렸다.
팬데믹이란 영어로‘Pandemic’으로 표기하며 범유행, 혹은 세계적 대유행이라는 뜻하고 있다. 어떤 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할 때 사용한다. 대표적 팬데믹에는 천연두와 결핵 등이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염병의 위험도에 따라 전염병 경보 등급을 1~6등급으로 나누는데, 이 가운데 최고 경보단계인 6등급을 의미하는 말이다.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이나 20세기 초 수백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홍콩 독감이 팬데믹의 대표적 사례다.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기원전 430년경에 아테네에 발생한 역병으로 인구의 4분의 1이 숨졌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팬데믹을 기록한 최초의 기록물로 추정된다고 한다.
엔데믹이란 영어로‘endemic’ 표기하며 풍토병(風土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감염병이 외부의 유입 없이 특정한 지리적 영역에서 지속해서 유지되거나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상황, 또는 그런 질병이다. 즉, 자연환경이나 생활 습관 중으로 유행을 반복하는 질병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감기가 있다. '엔데믹(endemic)'이라는 말은 '안'을 뜻하는 그리스어 'en'과 '사람, 사람들'을 뜻하는 'demos'에서 유래했다.
어느덧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서 엔데믹(일상적 유행)을 바라볼 수 있게 됐지만, 코로나19는 기업 그리고 중소 상인들과 가장 취약한 계층, 아동의 삶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 엔데믹이란 코로나19가 세상에서 소멸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유행하겠지만 충분한 예방과 치료를 할 수 있는 질병이라는 것이다. 이제 코로나19 위기 경보 수준은‘심각’에서 ‘경계’로 하향되고 남아있는 방역 조치들이 해제되는 것이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반복된 유행에 변이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하지만 높은 백신 접종률과 국민 절반 이상의 감염으로 사회 면역 수준이 높아지고, 국민의 높은 대처 의식이 일상 회복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본다. 이런 점들은 수없이 국난을 극복한 한국인의 DNA가 작동했으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며 더 발전적으로 이겨내는 대한민국이기를 응원한다.(2023.06.02.)
거제도(巨濟島)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메르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라는 배 이름은 너무나도 친숙하다. 단순히 관심을 두는 그 이상으로 감동하는 역사적인 스토리가 있기에 이 배 이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향한 고마움이 지워지지 않는다.
'흥남 철수작전'은 6.25 전쟁 중인 1950년 12월 15일부터 12월 26일까지 흥남에서 미 10군단과 대한민국 국군 1군단 그리고 피난민 10만여 명이 철수한 작전이다. 특히 거제도는 ‘국제시장’이란 영화를 통해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흥남 탈출 장면에서 우여곡절 끝에 흥남 부두를 출발한 10만여 명의 피란민을 받아들인 곳이며, 장승포항은 1만 4천 명의 피난민을 싣고 흥남항을 출발한 ‘메러디스 빅토리호’(7,600t급 수송선, 정원 60명)가 도착한 곳이다.
1950년 11월 말, 북진통일을 눈앞에 뒀다고 생각한 유엔군은 서부전선을 담당하던 미 8군이 중공군한테 대패를 당하자 11월 30일 동부전선에서 북진 중이던 미 10군단에 함흥, 흥남 지역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한 가운데 미 10군단 산하 미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일대에서 중공군 9병단의 포위에 걸려 미 10군단 전체가 중공군에게 어려움에 빠지자 최종적으로 유엔군은 12월 8일 흥남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12월 9일에 중공군이 원산까지 점령하면서 퇴로가 끊겼기 때문에 유엔군 사령부는 해상 철수가 이루어지는 흥남항 부두를 중심으로 동해에 있는 미 해군의 함포 사격의 도움을 받으며 유엔군과 한국군은 12월 15일 미 제1해병사단을 시작으로 미 10군단 전 병력이 흥남으로 집결, 해상을 통해 부산으로 철수를 하게 된다.
당시 철수하는 군대를 따라 20만 명이 넘는 피란민이 흥남으로 모였다. 10만여 명의 철수하는 부대와 무기, 장비를 수송해야 하는 배에 20만 명의 그 엄청난 숫자의 사람을 실을 자리도 없을 뿐 아니라 미군 지휘부는 피난민을 데려가는 것을 꺼렸다. 피난민을 태우느라 시간을 지체할수록 미군의 희생이 늘어나는 데다 병력과 장비, 물자를 싣는 데만도 수송선이 넉넉하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피난민 사이에 간첩이 침투하여 파괴 공작을 하게 되면 큰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한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 등 한국군 지휘관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여기에 미 10군단 사령관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통역이었던 20살의 현봉학, 해군 군수 참모로 상륙을 담당하는 에드워드 포니 대령이 중간에 매개체가 되어 알몬드 장군을 끈질기게 설득하니 마침내 "병력과 장비를 싣고 남는 자리가 있으면" 피난민을 태우기로 동의를 받게 되지만, 그러나 결국 선적했던 군수물자를 모두 배에서 내리고 레너드 라루 선장을 포함한 47명의 선원은 14,000명의 북한 피난민을 태우고 1950년 12월 흥남 철수 당시 마지막으로 흥남을 떠난 배 중 하나인 일반 화물선인 ‘메러디스 빅토리호’였다. 세계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상 구조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으며‘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인명을 구출한 세계기록(The greatest rescue operation by a single ship)’으로 2004년 9월 기네스북에 등록되기도 하였다.
특히 투철한 승무원 정신, 선장과 선원, 승무원들의 인도주의적인 희생과 사랑을 배경으로 물도, 먹을 양식도, 의료진이나 통역관도 없고, 심지어 화장실도 없는 상황에서 적군의 기뢰를 뚫고 3일간의 항해 끝에 크리스마스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을 내려놓았다. 2박 3일 항해하는 동안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다섯 명의 새 생명과 함께 1950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하였다. 당시 미군들은 다섯 명의 아이들을 김치 1, 2, 3, 4, 5호라고 불렀다. 새 생명과 함께 정박한 곳 장승포는 그날의 기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적 장소가 되었으며 새로운 희망을 잉태하는 곳이 되었다. 따뜻한 남쪽 섬 거제도(巨濟島)에서 일어난 것이다.
거제도(巨濟島)의 거(巨)는 거대하다, 크다는 것이며, 제(濟)는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 담겨 있어 물 건너온 동족 피난민들에게 크게 구휼(救恤)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2023.06.02.)
어머니! 그 이름을 부르면 언제나 마음이 따뜻해진다. 오월은 따스한 햇살과 푸르럼 사이로 어김없이 보고 싶은 어미니가 다가온다. 오래전 세상을 떠났어도 오늘도 그리운 이름이다. 사랑의 흔적으로 그리움을 남겨놓고 우리 곁은 떠났어도 오월에는 어머니를 만난다. 그 옛날 흑백영화 필름처럼 희미한 기억들이 선명한 컬러 TV로 전환된 듯 좋은 옷 입으시고 다가오셔서 나를 어루만지신다. 한 어머니의 자식으로 그 앞에 어린 소년으로 웃고 있다가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현실의 과거 여행이 1분이 1시간이 된 듯하다. 순간 느낌은 행복과 아쉬움이 뒤범벅되어 긴 숨을 토해낸다. 그러면서 옮조린다. ‘감사합니다. 송구합니다~’감사함과 더 못해 드렸음이 서로 교차하며 수많은 단어로 표현하지 못할 그 무엇인가가 가슴을 적시는 것 같다.
매년 가정의 달, 어버이 주일과 어버이날을 맞이한다. 특별한 이 날에 설교단에 올라 준비한 메시지를 전하는 중 “네 부모(父母)를 공경(恭敬)하라”라는 대목에서 목이 메인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당신이 원하는 것은 나의 행복이 아니라 자식의 행복을 위한 것임을 알기에 순간 떨리는 느낌은 감출 수가 없다. 아홉을 주고도 하나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시는 사랑이 왜 이제 되살아 나는 것일까? 내 가슴에 카네이션이 달릴 때면 늘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 붉은 카네이션을 오늘만 가슴에 달고 내리는 것이 아니라 책장에 꽂아두며 일년내내 어버이날이 된다. 효도(孝道)를 하려 해도 세월이 기다려 주지 않기에 오늘도 나의 이름은 ‘김죄송(金罪悚)’이다.
한문의 '효'(孝) 라는 글자는 '자'(子) 자와 '노'(老) 자가 합해진 글이다. 아들이 노친을 받들고 이에 순종함을 뜻한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라고 했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3:22)고 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모를 통해 자식에게 생명을 부여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여 부모에게는 효도(孝道)하라는 것이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부모에 대한 효(孝)가 강조됐다. 부모를 무시하거나 경멸해도 된다는 가르침은 어떠한 도덕이나 윤리, 종교도 없다.
병원에서 근무하던 의사가 어떤 목사를 만나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병원에서 일하다 보니, 자식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말했다. 의사 선생님!! "왜 자식이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까?"라고 물으니, 자식이 아파서 병원에 온 부모들은, 의사를 붙잡고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자식을 고쳐 달라"고 사정을 한단다. 그런데 노부모를 모시고 온 자식들은, "우리 부모가 앞으로 얼마나 사시겠냐?"라고 물어본다는 것이다. 이는 부모가 죽는 날만을 묻고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는 자식을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을 하는데, 부모가 아프면 부모를 살려 달라고 하는 자식은 많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창가에 공기가 변하듯 무엇이 찾아오고 떠나는 것처럼, 세상 이치를 보면 조금씩 다가오는 작별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나무도 오래되면 말라 죽듯 모든 생명체는 아프고 흔들리고 떠날 수 있음을 생각할 때이기에, 기회 있을 때 잘 모셔야 할 것이다.
정철(鄭澈)의 ‘훈민가(訓民歌)’ 내용 중 “어버이 살아 계실 때 섬길 일 다 하여라. 지나간 후에 애달프다 한들 어찌하리오. 평생에 다시 못 할 일이 이것뿐인가 하노라.”‘살아 계실 때’ 후회 없이 잘 섬기라는 것이다. 끝으로 고훈 목사가 쓴 [어머니]란 제목의 시(時)를 마음 모아 읽어본다. “당신은 내가 만난 맨 처음의 사람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란 것을 몸으로 가르치신 분도 당신입니다. 당신은 언제나 5월의 웃음, 주고도 떨어지지 않는 바다여 우리는 너무 늦게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너무 먼 곳에 계신 뒤에야 사랑은 이토록 강물 되어 흐르고 우리 또한 당신이 되어 이제야 그 사랑을 깨닫습니다”. (2023.05.31.)
커뮤니케이션은 우리의 일상이자 삶과 분리 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인간관계가 어렵게 느껴지면 꼬여져 버리고 오해하게 된다. 그러나 꼬여버린 것이 실타래처럼 풀리면 이해도 되거니와 진솔하고 인간적인 면이 친근하게 느껴질 때 쉽게 공감하며 이해하기도 한다. 문제는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주장이 강하다 보니 강퍅한 마음, 건조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영어에 understand 라는 단어가 있다. 이 말의 뜻은 ‘이해하다, 알다, 깨닫다, 납득하다’의 뜻으로 해석된다. 어원은 under(안에)+stand(서다)의 합성어이다. 그냥 단어의 뜻이 ‘이해하다’라는 것이지만, 사전적 의미보다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포괄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에 understand 라는 말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언어라는 것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위대한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과 서로 엉킬 때가 많다. 이를테면, 서로 말이 통하지 아니할 경우를 보면 머릿속에 자기의 말로만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대화는 자기의 말을 버릴 때이며 상대방 역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버릴 때 비로소 대화는 성립이 되는 것이다. 서로 말을 들어주고 경청하면 긴 대화가 아니라 눈빛과 미소로 대화가 즐겁게 이루어진다. 만약 내가 상대방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의 마음과 생각 속에 나의 말로만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화를 하려면 먼저 나의 말을 버리고 그 아래 서는 것이다. 그것이 understand이다. 의사 전달의 기술에도 경청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말하는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함으로써 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들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야기할 때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사랑의 표시는 바로 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저 사람은 나와 다른 게 아니라 다만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관계에서 더욱 자유로워진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이해와 오해가 공존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둘째 손가락으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을 ‘삿대질’이라고 하여 실례로 생각한다. 그러나 서양에서 둘째 손가락으로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는 상대의 시선을 끌기 위한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른께 물건을 드릴 때 공손히 두 손으로 드리는 것이 예의지만 서양에서는 상대방의 나이와 상관없이 한 손으로 물건을 주고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생각한다. 삶의 자리에서 형성된 관습이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외형적 안목에 의존해서 바라보는 성향이 짙을수록 오해의 소지도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걸레의 경우에 외형적 안목에 의존해서 바라보면 비천하기 그지없지만, 내면적 안목에 의존해서 바라보면 숭고하기 그지없다. 걸레는 다른 사물에 묻어 있는 더러움을 닦아내기 위해 걸레 자체는 더럽혀지면서 그렇게 스쳐 지나가면 그 상대방은 깨끗해진다. 결국에 더는 더럽혀질 수 없을 때 버려진다. 이해란 내면적인 안목에 의존해서 대상을 바라볼 때 숙성되고, 오해는 외면적인 안목에 의존해서 대상을 바라볼 때 편견으로 나타나기 쉬운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사랑이 있는 자리이다. 그렇기에 부모는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실패한 자식도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의 가슴은 항상 따뜻하다. 일상생활에 자주 사용되는 ‘효자손’은 대나무의 끝을 손가락처럼 구부려 손이 닿지 않는 부위를 긁을 수 있도록 만든 물건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나이 드신 부모님을 생각하니 ‘효자손’이라는 히트상품이 나오는 것이다. 오죽하면 언제 어느 순간에도 시원하게 등을 긁어주는 효자가 따로 없다고 효자손이라 하였을까? 이 조그만 제품에서도 나이 많으신 분을 이해하니까 귀한 상품이 되는 것이다. 그 누군가를 이해하면 진실이 보이게 되고 아쉬워하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이해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작은 배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23.05.28.)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Nazareth)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 가나(Kanah) 마을이 있다. 그 마을에 결혼식이 있는데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와 그리고 예수님의 열두제자들까지도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결혼식에 초대를 받아 가게 되는데 하필 그 잔치 자리에 포도주가 동이 나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풍습에서 결혼식 등 잔치에서 손님들에게 결혼식 행사에 걸맞은 좋은 음식과 술을 접대하는 것이 마땅하나 포도주가 떨어진 이 상황에서 혼주는 하객들에게 큰 실례를 범하는 일이기에 꽤 난감한 사안이다. 이로 인해 가나 혼인 잔치의 첫 번째 예수님의 이적이 실현된다.
여기서 잠시 혼주 집에 있는 돌항아리에 대해 살펴보자. 유대인의 정결 예식에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여있다(요2:6). 정결 예식에 쓰이는 돌항아리는 유대 사회의 정결 율법에 따라 두었던 돌항아리인데, 외부에서 활동하다가 집으로 들어올 때 반드시 돌 항아리의 물로 손과 발을 씻고 들어와야만 했었다. 마치 코로나19 때문에 손소독제로 손을 씻고 실내로 들어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제 유명한 가나 혼인 잔치의 구체적 스토리는 잠시 접고 실제 현장의 모습과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잔칫집에 풍류를 즐기는 소리, 노랫소리, 춤추는 소리, 웃는 소리가 나야 할 텐데 잔칫집이 이상하게 초상집 같다. 이곳에서 수군거리고 저쪽에서 수군거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포도주가 떨어졌다. 우리나라 같으면 소주나 막걸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지방의 문화는 술이 포도주였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에 웃을 일이 없다. 춤출 일이 없다. 잔칫집에 신랑·신부가 아무리 잘 생겨도 음식이 떨어지니 이제는 잔칫집이 아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생활을 반영이나 하듯이 포도주가 떨어진 것처럼 진정한 기쁨이 없다. 진정한 즐거움이 없다. 뭔가 진정한 노래가 없다. 삶의 의미가 식어 가는 삭막한 때이다. 집은 좋아졌는데, 먹을거리는 많아졌는데, GNP는 올라갔는데 기쁨이 없다. 실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시 살펴본다면, 거기 빈 항아리 6개가 있다. 우리 인생은 질그릇이다. 인생은 빈 항아리이다. 깨어지기 쉽다. 그런데 빈 항아리에 포도주가 가득 차 있을 때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환영을 받았지만, 속이 빈 항아리가 마당을 차지하고 있을 때는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에게 거슬리고 방해만 되는 것이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처럼 은혜가 떨어진 사람은 항상 거치는 자가 된다는 교훈이다.
자! 빈 항아리 6개, 포도주 떨어진 항아리, 사람에게 실망을 안겨다 주고 거치는 항아리는 가볍다. 잘 흔들거린다. 흔들거린다는 것은 변덕이 심하다는 말이다. 은혜 떨어진 사람은 계속 변덕 하는 것이다. 곡식보다 가라지는 가볍듯이 바람 부는 대로 흔들거린다. 성령의 포도주가 떨어진 사람은 세상 바람 부는 대로 흔들거리며 따라간다. 또 빈 항아리는 두드리면 소리가 난다. 세상 소리, 유혹 소리 등 자꾸만 소리가 난다. 포도주가 차 있을 때는 소리가 안 났는데 포도주가 떨어지니 소리가 난다. 마치 짐 없는 요란한 수레처럼 시끄럽고 요란하다. 그다음에는 빈 항아리는 잘 깨어진다. 공연히 깨어진다. 사업이 깨어지고 가정이 깨어지고 사랑이 깨어지고 육신이 깨어진다. 잔칫집 기운을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처럼 매우 비슷하다.
해답이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요2:6) 하실 때 빈 항아리마다 아구까지 가득 채우니 놀라운 이 벌어진다. 이것을 이적 또는 기적이라고 부른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니까 무엇이 달라졌느냐? 첫째, 색깔이 변한다. 둘째, 맛(질)이 변한다. 셋째, 분위기(웃음, 생동감)가 달라졌다. 훗날 영국의 위대한 시인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이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종교학 시험 문제에 “가나 혼인 잔치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라”라고 했을 때, “물이 그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더라”라고 명답을 했다. 우리도 인생에 주인을 만날 때 해답을 얻지 않을까? (2023.05.26.)
천 년 전에 낙엽수, 침엽수 높은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살던 까치는 지금도 그곳에서 집을 짓고 산다. 천 년 전에 땅굴을 파고 살던 여우는 지금도 땅굴을 파서 살아간다. 변함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많이 변했다. 사는 집, 입는 옷, 먹는 음식, 식성도 많이 변했다. 먹고 살기 힘든 옛날에는 모자라는 양식에 겨우 허기를 면할 수 있을 처지였다면 지금은 풍족함이 넘쳐나 영양가를 따지고 몸의 건강을 위해 많이 먹을 수 있음에도 절제를 한다. 이처럼 먹는 것도 변하고, 입는 것도 변하고, 생활양식도 변하여지고, 모든 방면에 다 변했다.
지금 세상은 급속도로변하고 있다. 변화라는 말을 할 때 단순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미 오래전에 앨빈 토플러는 ‘변화의 속도’를 말했고, 빌 게이츠는 ‘생각의 속도’를 말한 바 있다. 변화라는 것은 생활영역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데, 변화하지 못하면 80% 도태되고 20%만 따라간다고 한다. 이 말은 변화에 적응하느냐 못하느냐의 시대이다. 지금은 기업이 1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시대이다. 그만큼 변화무쌍한 시대이다. 세상의 빠른 속도를 감지하고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며 대처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세상이 좋아지고 삶의 질이 높아질수록 사람의 인간성은 변화보다는 오히려 변질이 되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까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요즘 세상 소식을 접하게 되면 절망에 가깝다. 차라리 텔레비전 뉴스와 정치, 사회 소식을 멀리하니 마음이 진정되는 느낌이다. 각자가 헌법기관이라고 자처하며 국민의 대표라고 하는 국회의원들을 보면 지금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사법 리스크, 돈 봉투 사건, 코인 사건, 정당 간의 불신 등 그들의 정치행태를 보면 기쁨이 없는 시대, 희망을 빼앗기는 답답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웃을 일도 많이 사라졌다.
변질(變質)과 변화(變化)는 같은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의미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변질(變質)은 ‘사물이나 물질의 성질이 변함’이며 변화(變化)는 ‘사물의 모양이나 성질이 바뀌어 달라짐’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쌀이 썩은 것은 변질한 것이고 쌀이 식혜가 된 것은 변화된 것이다. 똑같은 재료가 하나는 변질이고 하나는 변화다. 그렇다면 진정한 변화는 생각의 변화이고, 마음 자세에 변화이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인간의 두뇌는 종이와 같아서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세모꼴 또는 네모꼴도 될 수 있다"라고 했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서 인격과 삶이 결정된다.
신앙인들에게도 이런 면이 있다. 신앙이 있는 사람도 실수한다. 그럴 때 ‘나는 희망이 없어’ 하고 포기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초심을 잃은 변질, 곧 옛사람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잘못된 문제를 해결하면 다시 새롭게 된다. 이것을 신앙적 용어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흠이 하나도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자신을 새로운 존재로 인식하고 계속 새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말한다.
성서를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교훈한다. 새롭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시적인 변화는 결코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으며 결국 변질이 되고 만다. 진정한 변화는 내면 깊숙이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 자신이 변하지 않는 삶 자체는 세상에 별 의미 없는 존재로서 오히려 민폐를 끼칠 수 있다.
조동화 시인의 ‘나 하나 꽃피어’라는 감명스러운 글을 본다.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변화는 나 한 사람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2023.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