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常識)이란 '일반적인 사람이 다 가지고 있거나 있어야 할 지식이나 판단력'이라고 정의한다. 영어로는 common sense라고 표현하며 그 뜻은 상식, 흔히 볼 수 있는, 분별, 공통감각 등으로 이해된다. 즉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는 감각을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법(法)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하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다툼이나 갈등을 예방하고 공정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로서, 국가에 많은 사람이 함께 지키기로 약속하고 만든 규칙이다. 그러므로 법에서도 판결할 때, 일반 관습이나 관행, 상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판결에 담고 있다. 이 말은 법이라고 하는 것은 상식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것이며, 우리 사회에 퍼져있는 관행과 관습, 상식이 법조문을 이루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법은 모든 면에서 공감을 이룰 수 있고 공정하다고 생각하여 넉넉히 수용할 수 있는 결과를 얻기 위해 지킬 수 있는 것을 조문으로 입법화하기 때문에 그래서 법은 곧 상식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목회자로서 일반 목회 현장에서, 많은 보람도 아픔도 함께 경험한다. 각자 다를 수 있지만, 이러한 거룩한 사역에 공통으로 느끼며 고민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상식이라는 것이다. 신앙 세계에서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이라는 것은 거룩한 영역이어서 어떤 면으로 볼 때 믿음은 곧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날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목표가 있지만,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본질 아닌 비본질적인 문제로 인하여 일반상식적인 기준에서 멀어지면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게 된다. 그때는 믿음이라는 것이 상식보다도 못할 뿐 아니라 법과 규칙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사람들로 인하여 금 같은 믿음이 초라하게 되어 마치 그 모습이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고통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필자는 평소 “믿음보다 상식을”이라고 외치는 편이다. 물론 믿음을 추구하는 신앙 세계에서 모순적이며, 역설적인 것처럼 오해가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이 시대의 흐름에서 마음 아파하며 꼭 해야 할 말이었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신학자인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다.'라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할 수 있고 순종하는 자만이 믿을 수 있다.", "기독교의 본질은 종교와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인물과 관계가 있다. 종교는 죽은 것, 인간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 기독교의 핵심에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 생생히 자리하고 있으며, 그분을 대면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선하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라는 완전히 다른 질문을 요구한다고 했다.
이런 면으로 상식이라는 말을 신앙적 가치에 두어 접근해 볼 때 도덕과 종교 행위를 뛰어넘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의 헌신에 대한 그분의 절대적 요구를 진지하게 수용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본회퍼의 저서 "값비싼 은혜", '나를 따르라' 중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값싼 은혜란 참회가 없는 사죄요, 교회의 치리가 없는 세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요, 개인적인 참회가 없는 사죄다. 값싼 은혜란 뒤따름이 없는 은혜요, 십자가가 없는 은혜요, 인간이 되시고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다.”라고 깊은 울림을 주는 동시에 상식(常識)보다 못한 믿음을 질타하는 소리로 강하게 들려진다. 믿음의 알맹이가 빠진 값싼 은혜가 위장된 모습으로 다가와 얼마나 우리를 깊은 중병으로 빠뜨리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유대교가 상식을 져버리고 저들만의 선민사상으로 선택된 민족으로 보았을 때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서 보듯이 세상은 유대인들을 견제하고 무시했다. 독일의 교회가 상식을 지어버릴 때, 교회가 나치의 히틀러를 지지했다. 중세기독교가 상식을 이탈했을 때 무력으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책망받은 것은 인간의 탐욕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진실한 믿음 안에는 상식이 있음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상식이 멀어지지 않아야 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2025.03.10.거제신문).
▶오네시모(Onesimus)라는 이름은 '유익한', '유용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익한 존재였던 오네시모가 도망침으로 오히려 무익한 존재가 되어 그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의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헬라어로 '무익하다'라는 말을 아크레스톤(αχρηστον)이라고 하며‘유익하다’라는 유크레스톤(ευχρηστον)이라고 한다. 말의 표현은 거의 발음이 비슷하지만, 뜻은 정반대이다.
▶바울의 중재에서 보듯 사람을 살리고 서로의 유익을 위하는 간절함을 느끼게 된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유익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타락과 죄로 말미암아 무익한 존재가 되었지만, 다시 유익한 존재, 상생의 존재로 회복되어 나를 꽃피움으로써 이웃과 세상에 기쁨이 되는 빛나는 삶을 함께 나누어 본다(2024.10.28.).
▶우리가 감명 있게 즐겨 부르는 복음송 중에 ‘주님 말씀하시면’이라는 노래가 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라.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
첫 소절부터 우리를 도망갈 수 없는 믿음의 길로 이끌어 가는 메시지가 호소력 있게 전달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순례자의 발걸음을 연상케 한다. 우리를 향한 부르심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내용이 조심스럽고 엄숙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성도의 부르심과 순종 사이의 간격을 밀착시켜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바쁜 일상의 생활 속에 중요한 신앙의 핵심 요소가 조금 멀어지거나 희미해질 때, 이 하나의 찬양으로 첫사랑의 모습을 생각하고 회복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주님 말씀하시면' 가사에 숨겨진 진짜 의도를 볼 수 있다. 이 곡의 주안점은 주님이 말씀하실 때 '내가 나아가겠습니다!'라는 결단이 아니라 바로 그다음 소절이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추어 서는 것!', 지시하신 곳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결단보다 더 어려운 것은 지금껏 걸어왔던 그 길에서 '그건 내 뜻이 아니야'라고 하실 때 기꺼이 멈춘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사에 숨겨진 진짜 의도라고 한다. 더구나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쳐 진행 중인 것에도 '주님 뜻이 아니라면 내가 멈춰 서겠습니다'라는 것이다.
▶나아감에 필요한 것이 용기라면 멈춤에는 고통이 뒤따른다. 용기와 고통을 감수하고 뜻하신 그곳에 내가 있기를 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심정으로 사명과 사랑이 통합된 공간으로 들어가는 그것으로 생각한다. 나의 앞길이 주님 손에 있으니 그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사명이 이루어지는 그런 삶을 소망하기에 나를 위한 어떤 갈망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 철저히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2024.10.16.).